전남진, 구부러진 못
정신 바짝 차리며 살라고
못이 구부러진다, 구부러지면서
못은 그만 수직의 힘을 버린다
왜 딴생각하며 살았냐고
원망하듯 못이 구부러진다
나는 어디쯤에서 구부러졌을까
살아보자고 세상에 박히다
다들 어디쯤에서 구부러졌을까
망치를 돌려 구부러진 못을 편다
여기서 그만두고 싶다고
일어서지 않으려 고개를 들지 않는 못
아니다, 아니다, 그래도 살아봐야 하지 않겠냐고
살다 보면
한 번쯤은 정신을 놓을 때도 있지 않겠냐고
겨우 일으켜 세운 못대가리를 다시 내려친다
그래, 삶은 잘못 때린 불꽃처럼
짧구나, 너무 짧구나
가까스로 세상을 붙들고
잘못 때리면 아직도 불꽃을 토해낼 것 같은
구부러져 녹슬어가는 못
김기택, 소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송찬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입안의 비린내를 헹궈내고
달이 솟아오르는 창가
그의 옆에 앉는다
이미 궁기는 감춰두었건만
손을 핥고
연신 등을 부벼대는
이 마음의 비린내를 어쩐다
나는 처마 끝 달의 찬장을 열고
맑게 씻은
접시 하나 꺼낸다
오늘 저녁엔 내어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여기 이 희고 둥근 것이나 핥아보렴
조정인, 문신
고양이와 할머니가 살았다
고양이를 먼저 보내고 할머니는 5년을
더 살았다
나무식탁 다리 하나에
고양이는 셀 수 없는 발톱자국을 두고 갔다
발톱이 그린 무늬의 중심부는 거칠게 패였다
말해질 수 없는 비문으로
할머니는 그 자리를 오래, 쓰다듬고 또 쓰다듬고는 했다
하느님은 묵묵히 할머니의 남은 5년을 위해
그곳에 당신의 형상을 새겼던 거다
고독의 다른 이름은 하느님이기에
고양이를 보내고 할머니는 하느님과 살았던 거다
독거, 아니었다
식탁은 제 몸에 새겨진 문신을
늘 고마워했다
식탁은 침묵의 다른 이름이었다
고운기, 익숙해 진다는 것
오래된 내 바지는 내 엉덩이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칫솔은 내 입안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구두는 내 발가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빗은 내 머리카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귀갓길은 내 발자국 소리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아내는 내 숨소리를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오래된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바지도 칫솔도 구두도 밧도 익숙해지다 바꾼다
발자국 소리도 숨소리도 익숙해지다 멈춘다
그렇게 바꾸고 멈추는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