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규원, 나무가 있는 풍경
몹시 허리가 구부정한 한 그루 나무가
엉덩이를 불쑥 내밀고
다른 나무 사이에 생긴
그 초생달 같은 빈 틈에
파아란 하늘이 한 줌 박혀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간들간들 흔들리는
조그만 나뭇잎 하나가
그 하늘을 잘랐다 붙였다 하고 있다
최승호, 붕괴되는 사과
사과를 깎다가
구멍에서 꼼지락거리며
머리를 내미는 애벌레와 마주쳤다
애벌레는 화난 표정이었다
마치 자신이 소유한 별을
누가 건드렸냐는 듯 두리번거렸다
칼을 들고 나는 망설였다
사과는 애벌레의 부엌이자 방이요
뜯어먹을 한 세계였던 것이다
벌레구멍 주위를 천천히
나는 도려내기 시작했다
소유를 굳이 따지자면
사과는 사과나무의 소유라고 해야 하리라
사과를 한 입 물어뜯으며
입술의 물렁함을 나는 느꼈다
그리고 장님애벌레로 변신할 필요도 없이
나의 세계가 즙을 흘리며
붕괴되는 소리를 들었다
윤재철,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술값은 쟤들이 낼 거야
옆 자리 앉은 친구가 귀에 대고 소곤거린다
그때 나는 무슨 계시처럼
죽음을 떠올리고 빙긋이 웃는다
그래 죽을 때도 그러자
화장실 가는 것처럼 슬그머니
화장실 가서 안 오는 것처럼 슬그머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빗돌을 세우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왁자지껄한 잡담 속을 치기배처럼
한 건 하고 흔적 없이 사라지면 돼
아무렴 외로워지는 거야
외로워지는 연습
술집을 빠져나와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 걸으며
마음이 비로소 환해진다
이은심, 항상 저 쪽이 환하다
꽃 피는 것과는 관계도 없는 일이
꽃 지는 것과는 관계도 없는 일이
두 마디째를 우는 새와도 관계없는 일이
내 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수저통의 수저들이 죄다 등을 보이고
서먹하게 이파리들이 다 뒤집어져 있어도
산 채로 꺾이는 일만 없다면
나무 한 그루만큼만 꿋꿋하게 살자 했다
그대만 깊숙이 옮겨심고 들판처럼 멀리 나가자 했다
내 쪽을 헐어서
내일 모레 조금씩 아프면 그만이었다
문 밖에 세워두어도 슬픔의 주인은 변하지 않는 것
쓰라린 꽃에도 나비 날아드는 꿈이
내 사는 일의 치명적 낭비였다
최범영, 알림
저 시방 병원에 있슈
꼭 오라는 얘기는 아니네유
주스나 과일 먹고 싶어서도 아니네유
오랜만에 안부를 전하네유
보름 지났다는 말 못 해유
알고 온 이 하나 없단 말 못 해유
이 사람 저 사람 알리도 마세유
저 시방 병원에 있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