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순, 달 내놓아라 달 내놓아라
소나기 그친 뒤
장독대 빈 독 속에 달이 들었다
찰랑찰랑 달 하나 가득한 독
어디 숨어 있다 떼지어 나온 개구리들
달 내놓아라 달 내놓아라
밤새 아우성이다
박후기, 대구탕
대구탕을 먹는다
몸통 잃은 머리 한 토막
펄펄 끓는 탕기 속에서
허연 눈 부릅뜨고
사후(死後)를 견디고 있다
대구의 연옥이 인간의 밥그릇이다
이재무, 신발이 나를 신고
주어인 신발이 목적어인 나를 신고
직장에 가고 극장에 가고 술집에 가고 애인을 만나고
은행에 가고 학교에 가고 집안 대소사에 가고 동사무소에 가고
지하철 타고 내리고 버스 타고 내리고
현관에서 출발하여 현관으로 돌아오는 길
종일 끌고 다니며 날마다 닳아지는 살[肉]
끙끙, 봉지처럼 볼록해진 하루
힘겹게 벗어놓고
아무렇게나 구겨져 침구도 없이 안면에 든다
김명원, 죽음
손수 씻을 수 없는 아버지의 몸을
우리가 염해 드렸습니다
매일 새벽미사를 드리러
관절염을 앓던 다리로도 당당히 들어서시던 성당에
우리가 당신을 메고 들어갔습니다
혼자 걸어가실 수 없는 무덤까지
우리가 들어 드렸습니다, 당신의 집에
조심히 눕혀 드렸습니다
그토록 신세 지기 싫어 하셨어도 정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조행자, 생의 한 저녁
말하지 않아도 되는 날은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편했다
그랬더니 사람들은 나를 죽은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들의 생각이 그럴 수 있다에 머물렀을 때
난 그저 씩 웃으며 마음을 지웠다
어두운 대기 속으로 몸을 감추는
들꽃 길을 따라가며
내 존재의 자리는 어디인가란 생각보다
무관심에 관한 긴 휴식을 떠올렸다
가끔은 어둠의 가장 깊고 부드러운 안식에서
수 없이 그렸다 지웠던 욕망의 얄팍함에 기대었던
어둠의 과거를 생각했다
무엇인가 지상에서의 부질없는 것들은
누가 나를 죽은 사람으로 생각해도
내 부재의 자리를 가볍게 즐기는 오늘 저녁 생이여,
그래도 끝내 삶을 버려두지 않기에
마음 지운 자리 꼿꼿이 피어낸 망초꽃 한다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