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록, 주름살 사이의 젖은 그늘
백 대쯤
엉덩이를 얻어맞은 암소가
수렁논을 갈다 말고 우뚝 서서
파리를 쫓는 척, 긴 꼬리로
얻어터진 데를 비비다가
불현듯 고개를 꺾어
제 젖은 목주름을 보여주고는
저를 후려 팬 노인의
골진 이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그 긴 속눈썹 속에
젖은 해가 두 덩이
오래도록 식식거리는
저물녘의 수렁논
조원, 계란의 법칙
프라이팬 모서리나 숟가락으로
계란을 깨뜨리는 건
강도 높은 무기를 휘두르는 것이다
한 쪽만 쌍코피 터지는 것이다
계란으로 계란을 깨뜨릴 때는
당연한 듯 한 쪽이 먼저 깨져 준다
약자에게 맞불 놓는 건
금속성으로 계란을 치는 일
난폭한 짐승처럼 승리를 독식하는 일
누군가를 가차없이 두들긴 잘못으로
호되게 대가를 치른 적 있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위해
스스로 깨져주는 계란의 법칙
꽃과 꽃 사이, 나비와 나비 사이, 풀과 풀 사이
노란 민들레처럼 피어난 알의 몸이 뜨겁다
누군가 맨몸뚱이로 나를 깨뜨리고자 한다면
기꺼이 알몸으로 투항할 것이다
윤희상, 장닭
큰누님이 결혼한다고 도배하는 날
방 안의 장롱을 마당으로 꺼내놓았다
그래서, 마당에서 놀던 장닭과
장롱 거울 속의 장닭이 만났다
한쪽에서 웃으면, 다른 한쪽에서 웃고
한쪽에서 폼을 잡으면, 다른 한쪽에서 폼을 잡고
한쪽에서 노래하면, 다른 한쪽에서 노래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장닭이 장닭에게 덤벼들었다
서로 싸웠다
놀란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췄다
누가 먼저 덤벼들었는지 모른다
다행히 장닭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거울이 깨졌다
사람들은 눈앞의 장닭이
거울이 깨지면서
거울 속에서 걸어나온 장닭인지
마당에서 놀다가 거울 속으로 걸어들어간 장닭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경림, 옷걸이
불 꺼진 방 귀퉁이
장롱과 벽 사이에 그가 서 있다
비썩 마른 몸에
불쑥불쑥 못대가리를 내민 그가
후줄근한 껍데기를 자신에게 벗어 걸고
세상 모르고 잠든 식구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틈에
새우처럼 구부리고 누운
자신을 보고 있다
캄캄함으로 꽉 찬 하루를 보고 있다
문무학, 삶
‘삶’이란 글자는
사는 일처럼 복잡하다
‘살아감’이나 ‘사람’을
줄여 쓴 것 같기도 한데
아무리
글자를 줄여도
간단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