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후기, 자반고등어
가난한 아버지가 가련한 아들을 껴안고 잠든 밤
마른 이불과 따끈따끈한 요리를 꿈꾸며 잠든 밤
큰 슬픔이 작은 슬픔을 껴안고 잠든 밤
소금 같은 싸락눈이 신문지 갈피를 넘기며 염장을 지르는, 지하역의 겨울밤
정병근, 자화상
누가 나를 살고 있다
이따금 머리맡에 진동 벨이 울리고
냄비에 무언가가 끓고 있다
코를 훌쩍거리며
누가 나를 끓이고 있다
누군가의 바닥이자 천장인
잠과 수염의 어두운 체온을 둘둘 싸맨
수취인 불명의 첩첩 번지에
영락없는 내가 살고 있다
뒤는 멀고 앞은 가까워서
만남보다 이별이, 안보다 바깥이
할 일보다 안 할 일이 더 많아서
나갈 때보다 더 자주 들어온다
기억이 없다면, 다음 생이 온다 해도
어느 하염없는 표정으로 누가
또 나를 살거나 살지 않을 것이니
엘리베이터 첩첩 거울 속
내 뒤통수를 보고 있는
무한의 안 보이는 얼굴들, 들
김기택, 보육원에서
내가 웃으며 가까이 다가가자
아이는 처음 보는 나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린다
팔 벌리자마자 갑자기 아이 앞에 나타나는 허공
어서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커다란 허공
내 품에 안기자마자, 철컥
아이는 자석처럼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그 아이 뒤에는 다른 아이들이 있다
어린 눈마다 뚫려 있는 거대한 허공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정다혜, 시의 경제학
시 한 편 순산하려고 온몸 비틀다가
깜박 잊어 삶던 빨래를 까맣게 태워버렸네요
남편의 속옷 세 벌과 수건 다섯 장을
내 시 한 편과 바꿔버렸네요
어떤 시인은 시 한 편으로 문학상을 받고
어떤 시인은 꽤 많은 원고료를 받았다는데
나는 시 써서 벌기는커녕
어림잡아 오만 원 이상을 날려버렸네요
태워버린 것은 빨래뿐만이 아니라
빨래 삶는 대야까지 새까맣게 태워 버려
그걸 닦을 생각에 머릿속이 더 새까맣게 타네요
원고료는 잡지구독으로 대체되는
시인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시의 경제는 언제나 마이너스
오늘은 빨래를 태워버렸지만
다음엔 무얼 태워버릴지
속은 속대로 타는데요
혹시 이 시 수록해주고 원고료 대신
남편 속옷 세 벌과 수건 다섯 장 보내줄
착한 사마리언 어디 없나요
최종수, 달처럼
보름달은
어둠을 깨울 수 있지만
초승달은 어둠의 벗이 되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