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오늘의 약속
덩치 큰 이야기, 무거운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조그만 이야기, 가벼운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아침에 일어나 낯선 새 한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든지
길을 가다 담장 너머 아이들 떠들며 노는 소리가 들려 잠시 발을 멈췄다든지
미매 소리가 하늘 속으로 강물을 만들며 흘러가는 것을 문득 느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남의 이야기, 세상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우리들의 이야기, 서로의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지나간 밤 쉽게 잠이 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든지
하루 종일 보고픈 마음이 떠나지 않아 가슴이 뻐근했다든지
모처럼 개인 밤하늘 사이로 별하나 찾아내어 숨겨놓은 소원을 빌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실은 우리들 이야기만 하기에도 시간이 많지 않은걸
우리는 잘 알아요
그래요, 우리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오래 헤어져 살면서도
스스로 행복해 지기로 해요
그게 오늘의 약속이에요
조경희, 사과나무 정원
내 마음의 뜰에 자라는
한 그루 사과나무
봄부터 이제까지 싹을 틔우고
맑은 햇살 끌어당겨 수화 나누네
가지와 가지 사이를 오가는 새들이
허공 속에 푸릇한 알을 낳아 품으면
탐스럽게 익어가는
소슬한밤 뜰을 서성이노라면
끼리끼리 붉은 사과열매 사이에
조용히 맺히는 희고 둥근 달
누군가의 은밀한 그리움처럼
환하게 떴다가
어둠과 함께 숨어버리네
요절한 형제의 얼굴처럼
혹은, 이루지 못한 풋사랑의 얼굴처럼
채 익기도 전에
뚝
떨어져버리네
사과를 깎다보면 느낄 수 있네
사과 껍질 속 희고 시큼한 눈물
보일 듯 말듯 달빛 배어있네
김돈식, 은행잎
늦가을 금화같은
은행잎들이
쏴아 부는 바람에
일시에 다 떨어져서 없다
사람들도 가진 돈 있으면
나처럼
멋지게
다 쓰라고 한다
김광균, 와사등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홀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信號)냐
기인 여름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墓石)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夜景)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思念)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구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기일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김기택, 밥 생각
차가운 바람 퇴근길 더디 오는 버스 어둡고 긴 거리
희고 둥근 한 그릇 밥을 생각한다
텅 비어 쭈글쭈글해진 위장을 탱탱하게 펴줄 밥
꾸룩꾸룩 소리나는 배를 부드럽게 만져줄 밥
춥고 음침한 뱃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밥
잡생각들을 말끔하게 치워버려주고
깨끗해진 머릿속에 단정하게 들어오는
하얀 사기 그릇 하얀 김 하얀 밥
머리 가득 밥 생각 마음 가득 밥 생각
밥 생각으로 점점 배불러지는 밥 생각
한 그릇 밥처럼 환해지고 동그래지는 얼굴
그러나 밥을 먹고 나면 배가 든든해지면
다시 난폭하게 밀려들어올 오만가지 잡생각
머릿속이 뚱뚱해지고 지저분해지면
멀리 아주 멀리 사라져버릴 밥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