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제, 사랑하고도 외로운 것은
오다가다 주는 눈길들
처음부터 마다했겠습니까
백 년도 너머
한자리에 있었을 텐데요
바로 옆 소나무는 가지마저
터실터실 늙어 있더군요
사랑을 몰라서
외로운 것이겠습니까
차가운 천성
뜨겁게 운 적도 있었을 텐데요
가벼이 댕그랑거리는 풍경소리에는
눈길 하나 두지 않더군요
하지만, 예전처럼 이즈음이면
더엉더엉
뜨겁게 소리내어 울고 싶은
내소사 동종
사랑하고도 외로운 것은
녹슨 가슴으로 우는 소리, 더는
님의 심중에 닿지 못하고
자꾸만 부스러지는 까닭이겠지요
조규옥, 매미
누가
그리도 보고픈 걸까
밤새
잘 참는다 싶었더니
동 트기가 무섭게 울어대어
산이 쓸려가고 들이 쓸려가고
이름이라도
목청껏 불러대면
슬픔이나 그리움들이
조금은 가시는 걸까
살아가면서
목 놓아 울고픈 날이
어디 한두번 이었으랴
그래도 단 한번도
풀어내지 못했으니
가슴 곳곳에
울음들은 차고 또 차고
손세실리아, 얼음 호수
제 몸의 구멍이란 구멍 차례로 틀어막고
생각까지도 죄다 걸어닫더니만 결국
자신을 송두리째 염해버린 호수를 본다
일점 흔들림 없다 요지부동이다
살아온 날들 돌아보니 온통 소요다
중간중간 위태롭기도 했다
여기 이르는동안 단 한번이라도
세상으로부터 나를
완벽히 봉(封)해본 적 있던가
한 사나흘 죽어본 적 있던가
없다, 아무래도 엄살이 심했다
김설하, 사람이 그리운 날
그대가 누구이든 어디서 왔든
따뜻한 가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그리운 날
너그럽고 묵묵한 모습으로 서서
늙은 고목의 평온함으로 나를 반기는
다정한 사람이 몹시도 그리운 날
한줌 햇살 안온한 창가에 마주 앉아
마주보는 미소 한 모금에 눈시울 젖고
고요한 눈빛 마주하며 언 가슴 녹일수 있는
오늘은 못내 사람이 그리운 날
고성만, 따뜻한 오후
가슴 아픈 줄거리의 소설 책
먹을 것 앞에 놓고
특별히 바쁜 일 없는 오후
햇살 깊숙이 들이비치는 유리창 안
명태 화장지 조생종 밀감 있어요
물건 사라 외치는 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가 점점 멀어지는
쌀쌀한 바람 불어
두터운 옷차림으로 지나다니는 늦가을
언제 들어왔는지
벌 한 마리가 앵앵거릴 때
설핏 드는 낮잠 속의 꿈
볼이 붉은 어릴 적 친구
마음씨 살가운 누이들이 와서
살짝 꼬집어 줄 것 같은
아득히 멀어질수록 빛나는 옛 집
서둘러 기우는 해를 보면
울적함을 가장하여
무서운 저녁 이야기에
열을 올리는 전화 통화
내 생에 그런 날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