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c0smic-dreamer.tumblr.com/
BGM 출처 : https://youtu.be/pvZSiQXHL_E
천상병, 비오는 날
아침 깨니
부실부실 가랑비 내린다
자는 마누라 지갑을 뒤져
백 오십원을 훔쳐
아침 해장으로 나간다
막걸리 한 잔 내 속을 지지면
어찌 이리도 기분이 좋으냐
가방 들고 지나는 학생들이
그렇게도 싱싱하게 보이고
나의 늙음은 그저 노인 같다
비오는 아침의 이 신선감(新鮮感)을
나는 어찌 표현하리오
그저 사는 대로 살다가
깨끗이 눈감으리요
강영은, 비 오는 날의 연가
비오는 날에는
빗방울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
웅덩이 위에 고이는 가벼움으로
누군가에게 물결져 갈 때
바람에 부딪혀
동그란 평온이 흔들리고
비스듬히 꽂힐지 모르겠지만
문득, 그렇게 부딪히고 싶다
비오는 날에는
빗방울 같은 존재를 만나고 싶다
창문을 두둘기는 간절함으로
누군가 비밀번호를 누를 때
바람에 흩날려
흐르던 노래가 지워지고
희미하게 얼룩질지 모르겠지만
한순간, 그렇게 젖어들고 싶다
비오는 날에는
빗방울 같은 존재로 남고 싶다
가두거나 가볍게 굴릴 수 없는
투명한 세계
나무의 나이테처럼 옹이지거나
수갑 채우지는 않겠다
컵이나 주전자에
자유롭게 담기는 사유의 기쁨으로
빗방울 같은 내가
빗방울 같은 너에게
다만, 그렇게 담겨지고 싶다
정양, 이별
길가에 너를 내려놓고
남은 말들이 신호등에 걸려 머뭇거린다
뒷거울 속 네 발길 밑에는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다고 적혀 있다
뒷거울 속은 멀어도 가깝고
뒤에 있는 것들은 가까워도 멀다
돌아보지 말자고 우리는
서로 뒤에 있는데
맘 놓고 돌아보라고
신호등에 걸린 세월도
저만큼씩 뒤에 있구나
멀리 보이는 슬픔보다
참아버린 말들이 가깝다
가까워도 멀리 보이는
뒷거울 속 네 뒷모습
김영준, 물빛이 환하다
법수치 그 골짝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북태평양 멀리서
연어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 들린다
산벚 필 때 떠난 물소리를 잊지 않는
그들의 진한 본성
그런 그리움만으로도 법수(法水) 같이
남대천 물빛이 환하다
그래서일까
삶과 죽음이 한 꽃으로 피었다 지는 여기
그 물과 돌이 무어라 함께 중얼거린다
김태영, 어머니의 여름
호박넝쿨 담장을 기어오르다
곤두박질 치고
닭좇던 강아지들 지쳐 잠들었다
어머니 혼자만 고추를 따고 있다
모두들 바다로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다
흠뻑 젖은 어머니 모시적삼에서
산새소리
물흐르는 소리들린다
바람만이 어머니 가슴을 흔들고 있다
그토록 기다려온 세월이
밭고랑처럼 패인 얼굴로
뜨거운 여름보다 더 뜨겁게
가을을 꿈꾸고 있다
다 퍼주고 또 빈손이 되어도
언제나 사랑만 가득한 어머니의 여름
외로운 뜨락에
어머니의 넉넉한 아름다운 미소처럼
접시꽃이 피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