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unfleek.tumblr.com/
BGM 출처 : https://youtu.be/pJSnkDnfMp8
이진심, 라일락 그늘 아래서
햇빛이 실비처럼 조용히 내린다
대낮이 젖는다
축축한 손바닥이 양치식물처럼 늘어진다
라일락 가지에 보일락말락하던 꽃송이들
한꺼번에 자가증식을 한다
정적에 점거 당한 골목길을 나 쓸려 다닌다
통제할 수 없는 사랑
슬픔이 깊이서 수시로 손이 떨린다
아직도 식물처럼 사랑하는 법외엔
아는 것이 없고
네 입술, 그 가슴에 맞닥뜨리던 날만
기억한다
그 기억에 뿌리를 내리고
물을 찾아가는
독한 향수 같은 라일락 그늘 아래서
나 온 몸이 감전 당한다
미욱한 동물처럼
헐떡거리는 냄새에 갇혀
나 점점 사나워진다
고증식, 호박꽃 사랑
아직 거기 있었구나
고향집 낡은 흙담 위
더위 먹고 늘어진 호박꽃 잎새
홀로 마루 끝에 앉아 울먹일 때면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호박벌도 몇 마리 데려오고
시원한 바람 한 줄기 불러다
눈물 닦아 주더니
너 혼자 남았구나
다들 휩쓸려 떠난 자리에
밤이면 마당 귀 가득
초롱한 별떨기 이슬로 받아 먹고
아침이면
조막같은 그리움 매달고 나와
박천서, 오래된 구두
오늘을 끌고 가는 상념을 따라
오래된 구두 뒤축에서
바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삶의 질곡에 밤과 낮
자갈길도 휘어진 비탈길도
묵묵히 따라오는 줄 알았더니
언제부터인가 살갗이 갈라지며
답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지만
칭얼거려도 무시당하는 것이
없는 놈이 팔자라며 타이르고
비오는 날 발끝을 세워도
질퍽한 양말 울음앞에
벙어리 냉가슴 앓듯 앙다물고
손가락 헤아리며 날짜를 잡았지만
쉬 지켜지지 않는 신음소리
지친영혼 선술집 찾아들어
행여 누가 볼세라 구석진 자리
감추어보는 내 안에 근심
닳아빠진 구두 뒷굽 속에 들어앉은 사내
걸을 때마다 길이 덜커덕거렸다
양현근, 모든 그리운 것은 뒤쪽에 있다
아쉬움은 늘 한 발 늦게 오는지
대합실 기둥 뒤에 남겨진 배웅이 아프다
아닌 척 모르는 척 먼 산을 보고 있다
먼저 내밀지 못하는 안녕이란 얼마나 모진 것이냐
누구도 그 말을 입에 담지 않았지만
어쩌면 쉽게 올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기차가 왔던 길 만큼을 되돌아 떠난다
딱, 그 만큼의 거리를 두고
철길 근처의 낯익은 풍경에게도 다짐을 해두었다
그리운 것일수록 간격을 두면 넘치지 않는다고
침목과 침목사이에 두근거림을 묶어둔다
햇살은 덤불 속으로 숨어들고
레일을 따라 눈발이 빗겨들고
이 지상의 모든 서글픈 만남들이
그 이름을 캄캄하게 안아가야 하는 저녁
모든 그리운 것은 왜 뒤쪽에 있는지
보고 싶은 것은
왜 가슴 속에 바스락 소리를 숨겨놓고 있는 것인지
써레질이 끝난 저녁하늘에서는 순한 노을이
방금 떠나온 뒤쪽을 몇 번이고 돌아보고 있다
이규리, 풍경이 흔들린다
어금니 하나를 빼고 나서
그 낯선 자리 때문에
여러 번 혀를 깨물곤 했다
외줄 타는 이가 부채 하나로
허공을 세우는 건
공기를 미세하게 나누기 때문
균형을 깨지기 위해 있는 거라지만
그건 농담일 게다
한쪽 무릎을 꺾으면 온몸이 무너지는 건
짐승만의 일이 아니다
다친 무릎 끌며 가서 보았다
인각사 대웅전 기둥이
균형을 위해 견디고 있는 것을
기우뚱해 있는 저 버팀목까지도
서로 다른 쪽을 위해 놓지 않고 있는 믿음을
그 처마 끝에서
풍경은 그저 흔들리는 게 아니라
공기를 조절하며 처마를 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따금 소리내어 기둥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