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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식민지화 과정 - 3
게시물ID : history_1714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뭐이어드래?
추천 : 18
조회수 : 1570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4/07/17 20:27:52
 
1858년 9월, 베트남으로 파병된 프랑스군은 과거 1847년, 함대 포격으로 베트남에 도발을 감행했던 곳이기도 한 타낭(沱灢 : 베트남어로는 다낭)을 침공합니다.
 
Da_Nang_in_Vietnam_svg.png
 
 
거기에 예전에 자국 선교사가 베트남에서 살해당한 것을 구실삼은 스페인의 병력 800여명도 가세하여 다낭은 한달여만에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에 의해 함락당합니다. 베트남 입장에선 왕조의 수도 순화(順化 : 베트남어로 후에 -> 이하 후에)와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놓인 다낭이 프랑스에게 넘어간 셈이었으니 상당한 위협이었을 것이고 프랑스군도 이걸 노리고 있었죠.
 
 
阮知方.jpg
 
1859년 타낭 공방전에서 베트남군을 지휘한 완지방이란 무관. 이 완지방은 나중에 또 나옵니다.
 
 
제목 없음.jpg
 
위 지도에서 보시다시피 후에(Hue)와 다낭(Danang)은 지척에 놓인 거리였습니다.
 
 
타낭이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사덕제(嗣德帝)는 1만이 넘는 병력을 동원하여 북상해오는 프랑스군을 막게 하였고 프랑스군도 즉각 북상하여 후에로 직공하려 들었지만 완(阮) 왕조 군의 저항은 만만찮았고 결국 프랑스군은 후에로 진격하지 못했고 지리멸렬한 전투 끝에 5개월이라는 시간만 허비합니다.
 
Vua_Tu_Duc.jpg
 
완(阮) 왕조의 4대 황제 익종(翼宗) 사덕제(嗣德帝) 완복시(阮福時)
 
당시 프랑스군은 애초에 침공해온 기존의 1500여명의 병력에다 앞서 말씀드린 스페인 군대 8백여명, 거기에 추가로 지원온 병력까지 합산하여 대략 3천여명을 웃돌았고 완 왕조 병력은 그 세 배에 달했던지라 숫자적 열세 때문에 실패했다면 실패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프랑스군은 물자 및 병력 운송으로 이용하려 했던 수운이 강의 깊이가 함정이 진입할 만큼 그리 깊지가 못했던 문제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거기에 베트남 특유의 살인적인 더위와 전염병, 우기 등 여러모로 악재가 겹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수도로 진격해오는 프랑스군을 필사적으로 막던 완 왕조 군의 끈질긴 저항도 한몫 했겠지만 말이지요. 
 
아무튼 후에 공략에 실패한 프랑스군은 전략을 바꾸어 베트남 남부를 공략하기로 하고 점령한 타낭에 일부 병력을 남겨두고 주력군을 휘몰아 다음해인 1859년, 남부 최대의 도시 가정성(嘉定城), 즉 사이공을 공격합니다.
 
 
Prise_de_Saigon_18_Fevrier_1859_Antoine_Morel-Fatio.jpg
 
1859년 2월, 프랑스군의 사이공 공략.
 
 
가정성(이하 사이공)은 곧 함락되었고 프랑스군은 타낭에 이어 새로운 거점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지만 완 왕조 입장에서는 남부 최대의 도시가 떨어져 나갔다는 점 외에도 최대의 곡창지대를 상실했다는 면에서 상당한 타격이었습니다. 특히나 당시 베트남은 흉년을 겪고 있었던지라 이를 감안한다면 더욱이 말이죠.
 
사덕제도 사이공만큼은 내줄 수 없다 여겨 앞서 말씀드린 다낭 전투의 지휘관 완지방에게 다시 1만여명의 병력을 주어 사이공 탈환을 지시합니다. 이때 프랑스군에겐 재수없게도 중국 청나라와의 전쟁인 아편전쟁의 연장선인 다구포대 사건으로 인한 2차 아편전쟁의 여파로 베트남 침략에 동원된 주력 함대가 중국으로 가버린 탓에 이 무렵 사이공을 수비하는 병력도 불과 천여명 남짓한 소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화력의 우세덕택인지 프랑스군이 필사적으로 수비하여 완 왕조 군은 쉽사리 사이공을 탈환하지 못했고 함락직전까지 가는 위태위태한 공방전은 1년씩이나 지속됩니다만 이도 잠시, 오랜세월에 걸쳐 청을 두들겨 팬 끝에 굴복시키고 중국에서의 상황을 마무리 지은 후 다시 베트남으로 눈을 돌린 프랑스가 1861년, 70여척의 함대와 병력 5천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베트남으로 파견함으로서 상황은 다시 역전됩니다.
 
프랑스군은 사이공을 수비하는 자국군 수비대를 지원하고자 사이공 부근에 상륙하여 우월한 화력과 무기로 사이공을 에워싸다시피 한 베트남군을 격파, 사이공을 지켜냈고 또한 사이공 주변의 미추(渼湫), 변화(邊和) 두 지방을 함락하는데에 이어 계속해서 파지(婆地), 영륭(永隆) 등의 베트남 남부지방을 점령해 나갑니다. 그리고 점령한 영토 일대에 이른바 '코친차이나' 라 불리우는 식민지를 건설하니 이때가 1862년입니다.
 
 
indochina_20conquest_20map.gif
 
위 지도는 프랑스의 시기별 동남아시아 식민지 영역인데 청색(1859~1862)으로 표시된 부분이 이 무렵 프랑스의 코친 차이나 식민지입니다.    
 
 
한편 완 왕조는 설상가상으로 북부의 동경(東京 : 베트남어로는 통킹)에서 완 왕조 이전의 왕조인 여(黎) 왕조를 부흥시킨다는 명분하에 일어난 여유봉(黎維奉)의 반란으로 골머리를 썩히고 있었는데 이 북부에서의 반란을 진압하는데에 주력군을 동원한 바람에 남부에서 프랑스군이 땅따먹기하는 걸 방치하다시피 한 감도 없잖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완 왕조는 전쟁에서 패했는데다 북부에서의 급한 불을 끄는게 우선이었고 상실한 남부를 되찾을 겨를도 힘도 없었던지라 완 왕조 조정 내에서는 우선 직면한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고 먼저 프랑스와의 강화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판단하여 사덕제는 병부상서 반청간(潘淸簡)이란 대신을 강화사절로 보내 1862년, 협상 끝에 제1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합니다. 
 
 
Phan_Thanh_Gian.jpg
 
반청간(潘淸簡).
 
명명제(明命帝), 소치제(紹治帝), 사덕제 3대에 걸쳐 고위직을 역임하며 1차 사이공 조약 외에도 프랑스와의 외교에 완 왕조 대표사절로 임합니다. 점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가는 조국의 현실을 개탄하며 여러모로 반프랑스, 반식민지 운동, 민족운동을 주도하며 항전을 벌였고 결국에는 베트남의 민족 운동가들을 자극하고 일깨울 목적으로 자살로 생애를 마감합니다. 현재 베트남의 주요 위인들 중 하나로 베트남판 최익현, 민영환이라 할 수 있겠네요. 앞으로도 글 쓰면서 이 사람이 종종 나올듯 싶습니다.
      
 
제1차 사이공 조약은 한마디로 베트남판 강화도 조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조약 내용을 살펴보자면..
 
1. 남부 베트남의 3개 성(省)을 할양.
2. 3개 항구의 개방(스페인에게도)
3. 카톨릭 포교의 허용.
4. 프랑스의 배가 베트남 영해를 자유항해하는 것을 인정.
5. 베트남이 타국과 교섭할 때 프랑스의 허락을 받을 것. 
6. 막대한 전쟁 보상금 지불.
 
대략 이렇고 그 중 주된 내용은 굵게 강조한 위 3개 조항입니다. 1차라는 말에서 짐작하셨겠지만 이후 1873년에 다시 2차 조약이 맺어지고 이때도 역시 1차 못지 않은 굴욕적인 조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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