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현, 생의 간이역에서
"다음은 대전역입니다.
내리시기 전에 잊으신 물건이 없는지 살펴봅시다"
내 생애 잊고 내린 소중한 것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눈물나도록 감사했던 일들과
사랑했던 이름들과
때론 추억까지도 잊고
훌쩍 내려버린 시간
아 내리기 전에
한 번쯤 살펴보는 것이었는데
다음 역
내 생의 간이역에 내릴 때는
또 무엇을 두고 내리게 될는지
종착역까지
제대로 가지고 갈 것이
할머니, 어머니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박해옥, 봄, 그리고 비망록
비몽사몽 헤메이며 꿈꾼 것 같다
그해 느낌 좋던 봄 어느 날
운명 속으로 한사람 선들 들어서고
내 청춘의 뼈가 으스러지게 사랑했었다
삶과의 부딪침, 그 사랑의 방종
결코 만만한 세월은 아니었다
외발로 외줄을 타며 삶을 건넜고
절망을 오기로 버티던 시절
산다는 것은 형벌을 견디는 일이었다
운명은 괴력을 일삼았지만
다행히도 뒤끝은 없어서
행불행의 중간쯤에서
서늘히 앓던 지천명의 비애
침묵사이를 비집고
한껏 비만해진 고독이 들어선다
아, 낯선 이 적요
비우고 접어도 고여드는 섭한 마음
내 것과 비슷한 슬픔을 들고
쓸쓸한 누군가가 금방 지난 것 같은 축축한 뜨락
어둠을 삭혀낸 화목(花木)들은
눈부신 꽃등을 내 거는데
어리숙은 사람아
어쩌자고 슬픔을 내거는지
겨울은 갔지만
그 봄은 진즉에 죽었나보다
임기정, 그때 그리움
삽을 총처럼 어깨에 걸치고 아버지가 올 때쯤이면
서너 번쯤 바닥에 넘어져 상처 입은 주전자 들고
황씨 아저씨네 양조장으로 간다
독 안에든 막걸리 한 바가지 퍼 올리자
한 방울씩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이
기우뚱거리다 넘어지는 소리로 들린다
손을 번갈아 가며 들고 오다 힘이 부치며
코스모스에게 한 모금 먹여주고
열받아있는 바위도 식혀주며 오다가
맛이 어떤가
한 모금 입에 물고 푸르르 떨다가
끝 맛이 달콤하여 조금씩 마시다
집 앞을 나두고 엉엉 울던
비 오는 날
막걸리에 파전을 먹으며 아이를 쳐다보았지만
바통터치 할 수 없는 현실에
애꿎은 막걸리 통 거꾸로 들고 흔든다
황학주, 정해진 이별
그 길에 들어가는 당신을 보고 있습니다
밤늦도록 빗속에
천가죽처럼 묵직하게 처진
고목들이 줄 서 있고
그 길에 가는 자를 못 비추는
무뚝뚝한 등이 서 있습니다
헌 세상 같은 밤이 차고에 들고
얼룩이 배어 있는 이마를
나는 핸들 위에 가만히 찍습니다
짧지만 진행됐을 사랑이었습니다
진흙수렁에 화단 한 평은 올렸을 사랑이었습니다
내 몸만해도 벌써 말라
조만간 당신이 뒤져보지도 못했을 테지만
신음소리 없는 인연을 바랄 턱도 없었겠지만
사랑은, 병 깨는 소리에 놀라는
참 오래된 밥집만 남은 쓸쓸한 공원 같습니다
무변대핸데 라고 당신 말하겠지만
차라리 내게서 아주 멀리 가는 당신의 전부가
이제 첫 생에 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고통 바다라는 구원이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던 거지요
움푹한 영혼이 살았던 방바닥에
입맞춤 하나가 아직 일어나지 않지만
이제야 길을 잃어도 내가 없는 당신만이 있을 뿐입니다
김구식, 때로는 강도 아프다
조금만 아파도 강을 찾았었다
늘 거기 있어 편안한 강에
팔매질하며 던져버린 게 많았지만
그 바닥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저 강이니까 걸러내고
그저 물이니까 제 길 가는 줄 알았다
해질 녘 붉은 상처도
강은 깊이 끌어안고 있었고
나는 긴 그림자만 떠안겨 주었다
피울음을 토하기 시작했을 때도
강은 같이 흘러주지 않는 것들을
꼬옥 감싸고 있었다
등 떠밀려 굽은 갈대의 손짓
바다 어귀까지 따라온 붕어의 도약
아파도 같이 흐르면
삶은 뒤섞여서도 아름다우리라고
불현듯 내 가슴에도
푸른 강 한 줄기가 흐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