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일표, 달빛 사용 설명서
희귀종이 되어 멸종 위기에 처한 달빛은
머잖아 박물관 한 구석에 처박히거나
고서의 한 모퉁이에서 잔명을 이어갈 것이다
함부로 달빛 한 점 건드리지 마라
주의사항을 숙지하지 않으면
삽시간에 휘발할 것이다
여간해선 달빛 한 올 발굴할 수 없지만
용케 찾아낸 달빛은 쉽게 곁을 주지 않는다
달빛의 내심을 의심하는 자가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극약 처방하듯
시인의 손도 조심스럽다
자칫 늙은 절집 처마나 비춘다고 뭇매를 맞거나
한물간 음풍농월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조심하라
그대 혼자 지리산 책갈피에 숨어들어
백발 성성한 달빛 줄기를 읽어나가야 할 것이다
어설피 달빛 대붓을 들고
섬진강 모래밭에 끼적이지 마라
절필한 지 오래된 달빛은 서서히
뒤뜰 독 안에 여치 소리로 스며들거나
한 대접 정화수에 몸을 풀고 잠적할 것이니
조심하라
그대의 몸은 이미 많이 야위었다
양성우, 내일은 있다
머무는 곳도 없이 홀로 떠도는 자에게도
내일은 있다
붉은 초승달 아래 숨어서 울고
눈앞도 안 보이는 흙먼지 검은 연기 속을
헤맬지라도
아무도 없는 깊고 어둔 곳에서는
모든 시간의 작은 잎새들까지도
어느 날 문득 피었다가 지는 것이더냐
먼 땅 끝으로 부터 휘몰아쳐 오는 비바람이
오히려 모진 운명의 끝자락이라면
모래 위에 긴 발자국을 찍으며
이 벌판을 홀로 떠도는 자에게도
내일은 있다
무심한 저 강물 위에 그림자 지던
집은 이미 부서지고
아름다운 옛 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최옥, 우리도 나무처럼
때로는 한밤중 나무를 바라보자
잎사귀마다 제 몫의 어둠을 안고
가만히 밤을 건너가던
나무의 순한 눈을 마주보자
이른 아침, 가지마다 건져 올리던
햇살의 파닥거림을 들어보자
아아, 우리도 나무처럼
눈을 감고 조금씩 말을 줄여보자
할말을 모아 꽃으로 피워내는
나무의 눈부신 입술 같이
안으로 품어서 깊어지는 뿌리 하나
마음에 심어 두자
나태주, 겨울 농부
우리들의 가을은
귀퉁이에
검불더미만을 남겨놓고
저녁 하늘에 빈 달무리만을 띄워놓고
우리들 곁을
떠나갔습니다
보리밭에 보리씨를 뿌려놓고
마늘밭에 마늘쪽을 심어놓고
이제 이 나라에는
외롭고 긴 겨울이 찾아올 차례입니다
헛간의 콩깍지며
사래기를 되새김질하는 염소와
눈을 집어먹고 껍질 없는 알을 낳는 암탉과
어른들 몰래 꿩약을 놓는 아이들의 겨울이
찾아올 차례입니다
그리하여
봄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만이
눈 속에 갇혀 외롭게 우는 산새 소리를 들을 것이며
눈에 덮여서 더욱 싱싱하게 자라나는 보리밭의 보리싹들을
눈물겨운 눈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눈물겨운 눈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오인태, 등 뒤의 사랑
앞만 보며 걸어왔다
걷다가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등을 돌리자
저만치 걸어가는 사람의 하얀 등이
보였다. 아, 그는 내 등뒤에서
얼마나 많은 날을 흐느껴
울었던 것일까. 그 수척한 등줄기에
상수리나무였는지 혹은 자작나무였는지
잎들의 그림자가 눈물자국처럼 얼룩졌다
내가 이렇게 터무니없는 사랑을 좇아
끝도 보이지 않는 숲길을 앞만 보며
걸어올 때, 이따금 머리 위를 서늘하게
덮어 와서 내가 좇던 사랑의 환영으로
어른거렸던 그 어두운 그림자는
그의 슬픔의 그늘이었을까. 때때로
발목을 적셔와서 걸음을 무겁게 하던
그것은 그의 눈물이었을까
그럴 때마다 모든 숲이
파르르 떨며 흐느끼던 그것은
무너지는 오열이었을까
미안하다. 내 등뒤의 사랑
끝내 내가 쫓던 사랑은
보이지 않고 이렇게 문득
오던 길을 되돌아보게 되지만
나는 달려가 차마 그대의 등을
돌려세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