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수경, 피아노 치는 여자
피아노 속에는 동굴이 있네
현이 떨리는 틈새로
잡힐 듯 잡힐 듯
스타카토로 얼비치는 그림자
경계의 정수를 밝히는
선혈처럼 진한 울음
열손가락 촉수를 세워
휘몰아치는 담금질
모차르트의‘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
한 무리의 별똥이 떨어지고
깊은 어둠 속을 빠져나온 꿈들이
흑백의 선율로 출렁이며
고산 능선을 넘어
기억의 언저리에 다다를 때
젖은 눈가에
말갛게 씻긴 달빛 겹겹이 쌓이네
최윤정, 청도라지꽃 연가
도시 변두리 두 칸 전세방에
올린 머리 내려놓고 돌아온 집
내 방은 전에 없이 어두웠으나
나는 어둠에 쉬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밤은 규칙적으로 왔고 또한 늘 머물렀다
담장 위 사금파리 사이로 동천이 푸를 때
샛문을 열면 하얀 뒤안이 버선발로 들어와
밤새 하강한 별들을 누이는 것이었다
너희도 두고 온 마음들 부여잡고
군데군데 멍울이 맺혔구나
어둠에 익숙해지려 안간힘으로 버텨온 날들
오늘 밤별들이 뒤안으로 쏟아지면
이제 그만 내 방에도 창을 내고
하얀 도라지꽃으로 피어 보리라
멍울 하나쯤 가진 사람과 사랑도 해 보리라
가슴에 멍자국 하나 없는 사람을 나는 사랑하지 못한다
이덕규, 막차
이쯤에서 남은 것이 없으면
반쯤은 성공한 거다
밤을 새워 어둠 속을 달려온 열차가
막다른 벼랑 끝에 내몰린 짐승처럼
길게 한 번 울부짖고
더운 숨을 몰아쉬는 종착역
긴 나무의자에 몸을 깊숙이 구겨넣고
시린 가슴팍에
잔숨결이나 불어넣고 있는
한 사내의 나머지 실패한 쪽으로
등 돌려 누운 선잠 속에서
꼬깃꼬깃 접은 지폐 한 장 툭 떨어지고
그 위로 오늘 날짜
별 내용 없는 조간신문이
조용히 덮이는
다음 역을 묻지 않는
여기서는 그걸 첫차라 부른다
박용, 바람소리 그대 소리
불면의 밤을 건너야 하는 날이면
접어 둔 날의 일기를 뒤적여 본다
후미진 기억 그 먼 곳에서는 아직도
연민의 씨앗 하나 발아를 꿈꾸고
마침표 찍지 못한 일기 한 소절
시간의 분진으로 덮여 간다
가슴에 뜨거운 불하나 달고
하루살이 같은 당신을 유혹했던 나는
젊은 베르테르가 되지도 못한 지금
반백의 망토 자락에 그리움 감싸 안고
시간의 강나루에 거룻배 기다린다
땅이 닳으면 물줄기를 만들고
물줄 거친 곳마다 골은 깊어져
강이 되는 것을
가슴에서 흐르는 강물은 항시
거슬러 오르기만을 하나보다
휘익 ~ 바람 한 점 창문에 매달리면
불현듯 그대 오시던 그 밤인가
가슴에 불을 켠다
신경림, 떠도는 자의 노래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두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통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아마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