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연, 풍경 한 장
바다가 저만치 보이는 길에 이르고서야
비로소 가파른 곳에선 물살처럼
한 번쯤 허물어내려도 좋았다는 생각이 잠깐 지나간다
먼 길 어디에서 무너져 있던 집은
자력처럼 사람을 끄는 편안함이 있었다고 기억된다
벽이 버텨온 세상의 무게만큼 가벼워져서인가
알지 못한다 지나온 많은 집들 중에서
하필이면 나는 속 정겹게 내보이던
그 집의 사진을 골라든다
밑에서 아직도 제 모습 고집하고 있는 문틀이나 기와들
서있는 것들에 대해 일별도 없이 허물어져 내린
풍경 한 장, 그 안으로 자꾸만 가는 시린 마음의
서성이는 발끝은 때 놓친 봄꽃에 가 머문다
너도 수없이 일어서다 주저앉았겠다
뿌리깊은 슬픔이 꽃대 아득하도록
허공에 꽃잎 노오랗게 피워올렸겠다
물살이 거칠다 배가 사정없이 흔들린다 보름이다
윤성학, 감성돔을 찾아서
홀로 바위에 몸을 묶었다
바다가 변한다
영등철이 지나 바다가 몸을 바꿔 체온을 올리고
파도의 깃을 세우면
그들은 산란의 춤을 추기 시작한다
빠른 물살이 곶부리를 휘어감는 곳
빠른 리듬을 타고 온다
영등 감생이의 시즌이다
바닷물의 출렁거림은 흐름과 갈래를 지녔다
가장 강한 놈은 가장 빠른 곳에서만 논다
릴을 던져라 저기 본류대를 향해
가쁜 숨 참으며
마음 속 깊이로 채비를 흘려라
거칠고 빠른 그곳
거기 비늘을 펄떡이는 완강함
릴을 던져라
바다는 몸을 뒤채며 이리저리 본류대를 끌고 움직이지만
큰 놈은 언제나 본류에 있다
본류는 멀고
먼 데서부터 입질은 온다
바다의 마개를 뽑아 올릴 힘으로 나를 잡아채야 한다
팽팽한 포물선을 그리며 발밑에까지 끌려온 마찰저항
마지막 순간이 올 때
언제나 거기 있다
막, 채비를 흘려보냈다
온다
김영석, 썩지 않는 슬픔
멍들거나
피흘리는 아픔은
이내 삭은 거름이 되어
단단한 삶의 옹이를 만들지만
슬픔은 결코 썩지 않는다
고향집 뒤란
살구나무 밑에
썩지 않고 묻혀 있던
돌아가신 어머니의 흰 고무신처럼
그것은 어두운 마음 어느 구석에
초승달 걸려
오래오래 흐린 빛을 뿌린다
유현숙, 겨울 포구
겨울 소래 포구는
혼자먹는 내 고달픈 저녁처럼 쓸쓸했다
물때 따라 떠 내려온
채 녹지 못한 얼음 덩어리들이 노숙하던
몇 구의 주검 같다
멀리서 부터 온 지친 그들은
달리다 만 협궤 열차의 기억을 대신해서
천천히 흐르고
이제 먼 바다 위로 날기를 포기한 재갈매기는
포구변을 떠 다니며 제 몸만 살찌우고 있다
비린내 배인 눈 덮인 갯가에는
분실 신고 된 폐선 하나가 널브러져 있고
나는 치유되지 않는 깊은 우울과
바닥까지 추락한 절망의 부스러기와
그리고 아직도 다문다문 떠오르는 군색한
욕망의 찌꺼기를
소래 장터의 곰삭은 젓갈통에 깡그리
쏟아 붓는다
소금에 푹 절여진 세월 하나를 미끼로
누군가 갯바람 속에서
물에 빠진 멀건 겨울 해를 건져 올리려고
자꾸 헛손질 하고 있다
한병준, 대파를 까다 보면
대파를 까는 일은
누대를 들춰 보는 끈끈한 의식이거나
감싸주던 임들과의 만남, 또는
여러 갈래의 길고 긴 길을 만나는 일이다
대파에서 뻗어나온 여러 갈래의 길
그 길같이 시들어간
어머니의 어머니를 감싸주던 어머니를 내려놓고
그 어머니를 감싸 주던 어머니를 내려놓고
나를 감싸주고 있는 어머니도 내려놓는다
감싸주던 모든 여자들의 품을 내려놓고
머리에 드리워진 먹빛구름도 내려놓고
눈물나는 대파를 깐다
코와 눈, 귀와 입 모두 뛰어나와 사무친 대파를 깐다
그렇게 흠뻑 눈물을 쏟으며 내려놓다 보면
감싸주고 감싸주며 살아가는
하나로 이어진 끈끈한
모든 길을 비로소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