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겨울은 끝나지 않았지만
당신은 본래 흙이었는지 모릅니다
당신은 본래 땅이었는지 모릅니다
기껏 당신에게 눈발 같은 차가움으로나 내려앉고
당신과 나의 짧은 사랑에게 겨울이 길어
아픔으로 당신에게 떨어지는 내 모든 것을
내리면 녹이고 내리면 받아 녹이던
당신은 애초부터 흙이었는지 모릅니다
쑥잎 위에 눈발이 앉습니다
아직도 우리들의 겨울은 끝나지 않았지만
밤이 가고 한낮이 오면 그 눈발을 녹여
뿌리를 굵게 키울 어린 쑥들을 바라봅니다
지금 이렇게 눈 내리고 바람 세지만
이제는 결코 겨울이 사랑보다 길지 않으리란 것을 압니다
사랑이란 이렇게 깊은 받아들임인 것을 압니다
이제 나는 누구의 흙이 되어야 하는지를 압니다
김윤진, 가시나무새 사랑
어김없이 사랑은 제 자리에서
내 혼을 달라고 하시는 구려
내 혼마저 모두 가져가시면
그 다음은 어찌하려 하오
가시나무새를 아십니까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
일생에 단 한번 어떤 새보다 맑고
아름답게 울고 세상을 떠나는
가시나무새의 전설을
사랑 또한 일생에 단 한번인 것을
그 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말하렵니다
사랑이여
모든 것을 앗아가신다면
당신의 하나 뿐인 사랑 새임을 알게 하소서
양현주, 그대 가슴에 닿을 수 없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그대는 내 안에 집을 짓고 있습니다
꽃 등잔 나무에 걸어두고
가는 길마다 비추고 있습니다
사랑도 미움도
내 마음대로 어쩌지 못합니다
얼마나 깊이
빗장을 걸어 잠 그어야
바람이 불지 않을는지
그대처럼
순전하고 거룩한 사람이고 싶어
새벽이면
틈난 구멍위에 붉은 벽돌 하나 올려놓습니다
그대의 곧은 법아래서
달빛 감돌아 흐르는 저 피리소리
그리운 이여
흔들리지만 꽃잎으로 떨어져
그대 가슴에 닿을 수 없습니다
투명한 울림에
벌거벗은 영혼만 울고 있습니다
장남제, 등불 하나 밝혀두고 싶다
앞길을 밝히느라
두 눈에 쌍불 켜고
얼마나 서둘러 달려 나왔는지
밤의 깊은 계곡을
마침내 그렁그렁 엔진에서 소리가 난다
제 눈에 쌍불이래야
겨우 앞가림 정도
어디를 가도
얼마를 달려도
턱턱, 앞을 막아서던 어둠의 손아귀
캄캄해서가 아니라
언제고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더 두려웠던
다행히 어둠에는 끝이 있어
누구에게나 같은 길이로 있는
스스로 밝혀야 하는
하루치 밤
달려 나오다 보니 어느 새
어둠은 야위어져 나무 뒤로 숨었네
상처 하나 없이 어찌
내 몫의 어둠을 지났을까만
밝아지면서 드러나는 그 아문 흔적
너무나 또렷이 커 보여
어둠이 끝나는 이 곳에
등불 하나 걸어두고 가고 싶다
멀리서도 보이도록 높이
최석우, 눈꽃
누군가 말했었지
너 있는 곳에
눈꽃으로 떨어지고 싶다고
언제나 너를 덮는 눈꽃이 되고 싶다고
누군가 말했었지
독설을 퍼붓는다고
네 아픈 가슴이 달래어질 수는 없다고
그래도 세상은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것이 더 많다고
누군가 말했었지
세상을 살면서
너처럼 불확실한 것은 없었다고
두려움 없이 다가갈 수 있는 확신을 달라고
가버린 세월
아득한 날처럼 스러지는
눈꽃
지금 그 사람 어디 있는지
나도 그를 덮는 눈꽃으로 떨어지고 싶다고
숨어 써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