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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영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인데요,
스님께서 교육과 관련된 말씀을 하셨던 게 인상 깊었습니다.
‘지금까지 교육시스템은 모방을 위한 교육시스템이다.
앞으로는 모방이 아니라 창조를 위해서 나아가야 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제 공부에 어떻게 그런 원리를 적용해야 될지 궁금합니다.
그것부터 본인이 연구해야 돼요. (모두 웃음)
우리가 남의 얘기를 참고하는 건 좋습니다.
그런데 정해진 답을 구하려는 건 이미 우리가 모방시스템에 익숙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연구를 해야 돼요.
저는 연구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제가 특별히 창조적인 교육을 받아서 그런 걸까요? 그건 아니에요.
돌이켜보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형성된 거 같아요.
그렇다면 제 어린 시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저는 장난감을 직접 만들던 경험이 저에게 연구하는 습관을 길러준 것 같아요.
지금은 다 장난감을 돈 주고 구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돈 많은 사람이 좋은 장난감을 갖게 되지요.
그런데 저희가 어릴 때는 다 장난감을 직접 만들어서 갖고 놀았어요.
집에서 팽이도 만들고, 연도 만들고, 썰매도 만들고, 구슬도 만들었어요.
자, 구슬을 어떻게 집에서 만들었을까요? 신기하지요? 구슬은 ‘쪼대’라고 하는 찰흙으로 만듭니다.
일반적인 흙 말고 아주 특별한 흙인데, 그것을 손으로 비벼서 동그랗게 만들고,
그 안에 솜을 집어넣으면 더 단단해져요.
그것을 그늘에 말렸다가 불에 구운 뒤에 어디든 문질러서 반질반질하게 하면 그릇에 윤이 나는 것처럼 됩니다.
(청중들) 우와∼
구슬을 만들어서 갖고 노는 방법은 두 가지였습니다.
구슬치기와 구슬 깨뜨리기였는데,
그 중에 구슬 깨뜨리기는 서로 구슬을 때렸을 때 누구 게 깨지느냐를 겨루는 놀이였습니다.
그러니까 구슬을 단단하게, 잘 만들어야 되지요.
연도 마찬가지이에요.
연은 첫째, 잘, 멀리 날아야 되고, 둘째, 연 싸움을 붙여서 이겨야 됩니다.
연 싸움을 붙는 게 ‘줄 끊어먹기’예요.
줄 끊어먹기에서 이기려면 연도 잘 날아야 되지만 줄도 잘 끊어야 돼요.
그러려면 사기그릇을 잘 갈아서 가루를 만든 뒤에 풀과 개어서 연줄에 먹여서 바짝 말린 연줄을 만들어야 해요.
그런 연으로 상대편과 겨루면 상대편 연의 줄이 빨리 끊어지지요.
실은 명주실이 제일 강해요.
무명실은 무거워서 연이 그 줄의 무게를 견디기가 어렵고, 또 잘 끊어지기도 하지요.
이렇게 우리가 자란 어린 시절에는 장난감을 전부 스스로 만들어서 놀았어요.
팽이를 만들 때는 형들이 만드는 걸 보고 자기 나름대로는 잘 만들려고 굉장히 노력을 합니다.
친구들과 팽이를 갖고 놀 때 집을 몇 바퀴를 도느냐 내기를 하는데요,
어떤 때는 팽이가 집을 세 바퀴 돌다 넘어지고, 어떤 때는 다섯 바퀴 돌다 넘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팽이가 오래 돌도록 하려면 어떤 나무를 써야 되느냐? 생나무를 쓸 것이냐,
말린 나무를 쓸 것이냐?’ 어떤 나무는 말리면 갈라지니까 갈라지지 않는 나무로 잘 골라야 되거든요.
‘또 팽이의 아랫부분, 아래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부분의 길이를 얼마만큼 할 것이냐?’
팽이의 굵기에 따라서 길이를 조절해야 되거든요.
또 팽이의 맨 밑 부분, 팽이를 자꾸 돌리면 그 부분이 잘 닳으니까 거기에 못을 박거나 베어링,
즉 작은 쇠구슬을 박아야 돼요.
그때도 균형을 잘 잡는 게 중요합니다.
또 ‘팽이를 때리는 채를 무슨 줄로 하느냐? 닥나무로 하느냐? 삼으로 하느냐?도 중요합니다.
그렇게 팽이를 길게도 만들어보고, 짧게도 만들어보고, 이 나무로도 만들어보고,
저 나무로도 만들어보고, 밑에 쇠구슬을 이걸로도 박아보고,
저걸로도 박아보는 등 친구들과 경쟁하면서 수없는 시행착오를 통해 팽이에 자꾸 변화를 주는 거예요.
연도 마찬가지이에요.
‘대나무를 얼마만큼 말린 걸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연줄, 목줄의 각도를 몇 도로 해야 바람을 잘 받느냐?
꼬리를 어느 정도 길이로 해야 되느냐?’ 계속 연구를 해야 돼요.
썰매도 만들어서 타보고 실패하면 또 새로 만들고 그러느라 손에 다 상처투성이였어요.
그러니까 그런 걸 끊임없이 연구를 해야 되는 거였어요.
벤치마킹도 했어요. ‘누구 거 좋더라’ 그러면 그 애 집에 가서 구경도 했고요.
여러분들은 ‘누가 잘 만든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가서 ‘돈 주고 만들어 달라’고 하겠지만
우리는 줄 돈이 없으니까 ‘어느 집 형아가 잘 만든다’ 그러면 그 형 집에 가서 보고 온 뒤에 스스로 만들었어요.
그 시절에 장난감은 가끔 친형이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거의 대부분은 스스로 만드는 거였어요.
그러니까 이런 작업이 결국은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보는 식으로 사물을 연구하는 자세와 해 보고, 또 해 보는,
그런 연습하는 자세의 기초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서 제가 비교적 조기교육을 잘 받았다고 말하는 거예요.(모두 웃음)
그때 만약 부모가 부유해서 장난감을 사줬거나 했다면 그렇게 사유할 여유가 없었겠지요.
또 도시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렇게 만들 기회도 없었겠지요.
또 시골이라도 부잣집에서 태어났더라면 머슴이 해 주거나 누구 잘하는 사람이 해주는 걸 받아서 놀았겠지요.
제 창조력은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형성이 가능했던 거예요.
보통 사람들은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서 이생에 부잣집에 태어났다’고들 말하지만
저는 역으로 ‘내가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서 이생에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조기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창조적인 사고를 좀 갖게 되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아이들에게 교육을 시킬 때 창조적인 훈련을 시키려면 부모가 뭘 해 주면 안돼요.
아이들이 알아서 하도록 계속 훈련시켜야 되고,
또 더 좋게 하려고 역시 아이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애를 쓰도록 해야 돼요.
그리고 정답이 없어야 돼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과제를 줄 때도 ‘이 문제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서
아이가 ‘전 이렇게 하겠습니다’ 했을 때 ‘틀렸다, 맞다’ 즉 ‘O, X’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제가 팽이를 만들었을 때 ‘O, X’, 즉 ‘이건 팽이다, 팽이가 아니다’ 이런 건 없단 말이에요.
‘팽이는 팽인데, 팽이가 잘 도느냐, 못 도느냐’의 문제이지요.
그리고 팽이가 잘못 돈다면 ‘팽이를 잘못 만들었다’가 아니라
더 잘 만들어서 더 잘 돌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하면 되는 거예요.
그것은 실패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이렇게 하면 되겠습니다’ 했을 때 선생님은 ‘아, 그건 좋은 생각이다’,
‘저렇게 하면 되겠습니다’ 했을 때도 선생님은 ‘오, 그것도 좋은 생각이다’,
‘저는 이렇게 해 볼래요’ 했을 때도 선생님은 ‘오, 그것은 선생님도 생각을 못 해 본 방법이다.’
이런 식으로, 어떤 시도든 다 ‘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다’라고 인정해 주는 게 중요합니다.
단, 아이가 앞뒤가 안 맞는 모순을 말할 경우에 그것은 지적을 해 줘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아이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엄마가 ‘공부해라’고 할 게 아니라
‘너는 대학 안 갈 거니?’ 이렇게 물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이가 ‘저는 안 갈 거예요’ 이러면 ‘좋은 결정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돼요.(모두 웃음)
그런데 ‘갈 거예요’ 이러면 ‘오, 그래? 그럼 공부 안 해도 대학갈 수가 있니?’ 이렇게 물어야 돼요.
‘아니에요.’ 그러면 ‘그럼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할래?’ 그랬을 때
아이가 ‘대학 가려면 공부해야 돼요’라고 하면 그걸로 돼요.
그런데 대학 안 가겠다는 아이, 대학을 가기 싫어서 공부를 안 하는 아이를 나무라면 안 됩니다.
그 아이가 잘못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대학은 가고 싶은데,
공부는 하기 싫다’는 건 모순이잖아요.
그 모순은 지적해 줘야 돼요.
삶에 대해 항상 연구를 해서 자기 삶의 어떤 모순을 조금씩 극복해 가서
하루하루 지나면서 조금씩 발전해 가는 게 필요합니다.
이렇게 사유체계나 삶의 자세가 창조적이어야 해요.
호미를 하나 써도, 낫을 하나 써도 이렇게, 저렇게 해 보면서
어떻게 써야 효율적인지를 연구하게 자세가 바로 ‘창조’예요.
밥을 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밥을 자꾸 해 보면 밥이 탈 때도 있고, 설익을 때도 있고, 죽이 될 때도 있는데,
해 보면서 불의 세기나 이런 것들을 자꾸 조절해야 실패가 반복되지 않지요.
밥을 잘 하려면 첫째, 쌀이 어느 정도 건조되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햅쌀은 물에 너무 불리면 안 되고, 묵은쌀은 30분 정도 불려야 합니다.
묵은쌀과 햅쌀의 차이가 뭘까요? 건조도의 차이지요.
묵은쌀은 벼를 수확한지 이미 몇 개월이 지났다는 거고,
햅쌀은 수확한지 한두 달밖에 안 지났기 때문에 수분이 많기 때문에
햅쌀일 때는 물을 조금 적게 넣고 밥을 해야 되고, 묵은쌀일 때는 많이 불리고 물도 조금 더 넣고 해야 돼요.
또 불은 처음에는 세게 하고, 끓을 때부터는 온도를 낮춰서 천천히 뜸을 들여야 하고요.
계속 온도를 높인 채로 끓여버리면 밑은 타고, 위는 설익게 되지요.
또 냄비 밥을 할 때는 뚜껑을 딱 닫아서 눌러놔야 돼요.
요즘은 전기밥솥으로 밥을 하니까 그럴 필요가 없지만 냄비 밥을 할 때
뚜껑이 가벼우면 내부의 온도가 100도밖에 안 되는데,
뚜껑을 돌로 눌러놓거나 해서 무겁게 해 놓으면 내부의 온도가 100도가 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산에 가서 밥을 할 때는 뚜껑 위에 돌을 얹어야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산에 올라가면 기압이 낮기 때문에 물이 100도가 안 돼도 끓어버리거든요.
그러면 밥이 설익게 되지요.
이런 식으로 연구를 해서 밥을 하면 처음에는 밥을 잘못 지었더라도 몇 번 거듭 하다보면 밥이 제대로 되는 겁니다.
그런데 3층밥 지었다가 2층밥 지었다가 죽 만들었다가 꼬드밥 만드는 사람은 연구하는 자세가 없는 거죠.
결과가 잘못 나오면 그것을 살펴서 뭐가 잘못됐는지를 알아보고 조정하는 게 아니라,
잘못 나오면 그냥 앉아서 우는 거예요.
아니면 남한테 해 달라 그러는 거예요.
그러는 것은 교육방식이 잘못 되어서 스스로 연구를 할 줄 모르기 때문이에요.
왜 한국은 지금과 같은 이런 교육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지난 100년 동안 우리가 선진국을 롤 모델로 삼고 따라 배우기, 모방을 했기 때문입니다.
선진국을 모방하면 실수할 확률이 적잖아요? 그래서 그때는 실수하면 낙오자 취급을 했어요.
그런데 창조의 시대에는 실수가 정상이에요.
창조라는 것은 여러 번의 실험 끝에 결과를 얻는 것인데,
실험을 딱 한 번 했는데 새로운 게 발견되는 일은 드물잖아요.
그래서 때로는 10번, 20번, 100번 실험을 통해서 새로운 걸 찾아내게 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우리의 교육은 ‘O, X’, 즉 ‘정답 맞추기’였어요.
그런데 미지의 세계, 즉 창조의 세계에는 답이 없어요.
그래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불확정성 때문에 ‘어떤 것이 더 유리하다’,
‘확률이 높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반드시 맞다’고 말할 수는 없거든요.
그러니까 교육시스템이 전체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는 ‘창조나 연구’라 그러면 습관적으로 무슨 첨단과학기술만 생각하는데,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창조나 연구가 필요하지요.
연애의 경우에도 여러분들은 한번 연애해 보고 헤어지면
상대에게 배신감을 느끼면서 미워하거나 원망하거나 울기만 하지요.
그런데 사실은 ‘오? 뭐가 잘못됐던 거지?’ 이렇게 연구해야 될 거 아니겠어요?
그렇게 연구하면 5번 정도 실패한 후에는 연애박사는 물론,
어떻게 인간관계를 맺어야 될지에 대해 많이 알게 될 거 아니겠어요?
그런 자세가 바로 창조입니다.
그럼 그런 삶에 대한 기본자세가 여러분들에게 왜 부족할까요?
여러분들이 어릴 때부터 그렇게 연구하는 자세를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이 밥 달라고 하면 부모가 밥 주고, 옷 달라고 하면 옷 주고,
장난감 달라고 하면 장난감 주고 그러니까 ‘왜 쟤는 좋은 거 주는데,
나는 나쁜 것만 주느냐?’ 이런 생각만 했지, 어떻게 만들어야 되는지,
어떻게 하면 잘 될지를 연구해 본 경험이 거의 없잖아요.
지금까지 이런 교육이 효과를 본 이유는, 우리 사회 전체가 모방적 사회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그런데 미래사회는 누구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요.
20년 후에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직업 중에 어떤 게 없어질지,
어떤 직업이 생길지는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겁니다만,
지난 경험을 살펴보면 지금 있는 직업 중에 상당수는 앞으로 없어질 거라는 거예요.
가장 대표적으로 10년, 20년만 지나면 택시기사는 다 없어질 거예요.
이미 무인자동차가 나와 있고, 더 발전해 갈 것이니까요.
은행직원도 거의 대부분 없어지겠지요? 전부 인터넷뱅킹을 이용하게 될 것이니까요.
아마 빠른 속도로 기존에 있던 직업이 없어지고,
생각하지도 못한 다른 직업이 생겨날 거예요.
그런데 지금 어린애들,
즉 지금으로부터 20년 후에나 사회에 나가게 될 초등학생들을 지금 세대에 맞게끔 훈련을 시키면 안 되겠지요.
조선조 말엽인 1880년에 아이를 서당에 보냈는데,
1900년에 과거제도가 폐지되니까 그 아이가 서당에 다녔던 게 아무 쓸모가 없게 됐던 것처럼
황당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16년간 배웠던 지식,
공부했던 내용들은 지금 인터넷 검색사이트에 검색만 하면 되는
단순지식들뿐이라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는 거예요.
제가 스님이 되지 않았다면 첫째, 수학선생, 둘째, 가이드, 셋째 택시기사가 될 수 있었을 거에요.
왜? 제가 길을 잘 알고, 지도를 잘 보기 때문에.
그런데 이 세 가지 직업 중에 벌써 하나는 없어져버렸어요.
바로 택시기사입니다. 제가 길을 잘 안다는 건 더 이상 저의 재능이라고 말할 수가 없게 된 거예요.
지도를 잘 보는 저이지만 지금은 네비게이션한테 밀렸어요.
네비게이션도 초창기에는 저보다도 못하더니,
요즘에는 똑똑해져서 저보다 월등히 나아요.
교통체증에 대한 정보를 위성으로부터 받아서 파악하니까요. 그렇지요?
(청중들) 예.
이제 우리는 자신의 재능 중에 굉장히 중요한 재능도 아무 쓸모가 없어지는 시대를 직면한 거예요.
앞으로 또 어떤 우리의 재능이 순식간에 필요가 없어져버릴지 몰라요.
저는 어릴 때 암산과 주산을 잘 했는데 그 재능이 전혀 쓸모없어지는 경험을 했어요.
계산할 내용이 많은 건 제가 전자계산기를 따라갈 수가 없어요.
그런 것처럼 앞으로는 우리가 배운 것 중에 이렇게 단순지식을 쌓는 건 언제든 기계가 대신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창조는 대신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문제예요.
기계란 우리가 거기에 정보를 일일이 다 입력해야 작동하는 거니까요.
그런데 앞으로는 우리가 굳이 조작하지 않아도 제 스스로 업그레이드를 하는 인공지능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스스로 진화하는, 그런 임계점을 넘어버리면 상황은 엄청 달라질 겁니다.
아직은 임계점을 넘진 않았지만 앞으로 임계점을 넘어버리면 스스로 진화하는 새로운 생명이 나오게 되는 거예요.
유기체가 아니라 무기체인데도 생명작용을 하는 시대에 우리는 직면하게 될 거예요.
우리가 ‘생명’이라 그러면 유기체 생명, 한 가지 밖에 몰랐는데,
앞으로는 3종류의 생명이 존재하게 될 겁니다.
첫 번째, 유기체 생명은 유기체 생명인데 유전자조작을 한 생명이에요.
그것은 자연에 의해서 진화한 거예요, 인간의 조작에 의해서 이루어진 거예요?
(청중들) 인간의 조작.
그러니까 유기체 생명, 그 자체는 그 자체이지만 유전자를 조작해서 지능이 더 있게 만든다든지,
눈이 더 잘 보이게 만든다든지, 귀가 더 잘 들리게 만든다든지, 병이 덜 나게 만든다든지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미 식물 중에는 병이 덜 나도록 하는, 병충해에 강한 종자를 만들어냈잖아요.
또 이미 식물은 벌써 2종을 하나의 종으로 합성한 것도 많잖아요.
예를 들어 밑에는 감자인데 위에는 토마토가 달렸다든지, 하는 것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종은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믿었거나 자연의 진화를 통해서 있게 되었다고 믿었는데,
이제는 종도 인위적으로 바꿀 수가 있는 거예요.
두 번째, 제가 평소 안경을 끼고, 지금 마이크를 쓰는 것도 유기체에 무기체를 결합시킨 거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안 보이는 걸 보이게 하고, 작은 목소리를 크게 하잖아요.
예를 들어 저와 안경을 결합시키면 만약 제가 두 눈이 다 안 보인다 해도
컴퓨터칩을 제 뇌에 심어서 보이게 만들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까 인공눈을 만드는 거죠.
이미 공장에서는 물건을 들 때 기계를 이용해서 인간의 힘보다 5배 내지 10배는 더 큰 힘을 사용하고 있잖아요?
이런 식으로 유기체와 무기체를 반반씩 결합시켜서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한 파워를 내는 생명,
즉 사이보그를 탄생시킬 수도 있는 거예요.
지금 그럴 가능성이 열려 있는 거예요.
세 번째, 인공지능이 스스로 업그레이드하는 수준까지 넘어가버리면,
그건 원래 무기체인데도 생명작용을 한다고 말할 수가 있는 거예요.
오늘 날 사람이 자동차를 자동 생산하는 걸 ‘복제’라고 하지는 않지요.
또, 생명은 자기와 똑같은 걸 스스로 복제하는 능력이 있는 걸 생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직 아무리 자동화가 되었다 하더라도 인공지능이 인공지능을 복제할 수는 없는데,
앞으로 더 발달이 되어서 인공지능이 자기와 똑같은 걸 스스로 만들 능력이 생긴다면
그건 ‘새로운 생명이다’ 이렇게 봐야 됩니다. 그럴 가능성이 지금 열려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가 생명이라고 말했던 것이 3가지 다른 경로,
다른 차원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어있는데,
그런 세상은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윤리, 도덕으로는 감당하기가 어렵지요.
그래서 앞으로는 이런 것까지 다 해명할 수 있는 철학이나 사상이 나와야 됩니다.
그러려면 사유가 창조적이어야 해요.
그런데 오늘 날의 종교는 1,000년이나 2,000년 전에,
그 당시의 세상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나왔던 사상이란 말이에요.
그때는 나름대로 획기적인 사상이었어요. 그런데 2,000년 전 것을 계속 우려먹는 방식은 이미 낡은 거지요.
그러니까 창조적이라는 것은 ‘이것이 창조적이다’라고 정해버리면 그게 창조적이에요, 창조적이 아니에요?
(청중들) 아니에요.
예. 창조적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연구하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번에 어떤 분이 질문을 했는데,
학부형, 학교선생님, 교육청 직원, 지역공무원을 합해서 혁신학교를 만들어 3년을 운영해 봤는데 실패했다는 거예요.
그 실패의 원인은 공무원들이 너무 전시행정을 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건 아니다. 창조교육을 누구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실패한 거다’라고 말했어요.
학부형도, 선생님도, 교육공무원도, 구청의 공무원도 받아본 적이 없는데,
모르는 사람 넷이 모여서 뭘 해 보겠다고 하면 실패하기가 쉬울까요, 성공하기가 쉬울까요?
(청중들) 실패요.
예. 그래서 혁신학교는 100% 실패해요. 혁신학교가 성공할 것이라고 했다면
그 발상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제 말 이해하시겠어요?
(청중들) 예.
그러니까 ‘혁신학교는 성공할 거야!’라고 생각하고 시작하면 안 되고 실험삼아 해야 돼요.
실험은 당연히 실패를 거듭하는 게 정상이에요.
그러면 실패했을 때 넷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해야 돼요.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연구하는 거예요.
‘아, 이걸 한번 개선해 보자. 이것도 한번 개선해 보자.’ 그래서 다시 했더니 또 실패했다? 그게 정상이에요.
‘그러면 또 이걸 한번 해 보자.’
이렇게 실패를 해 가면서 연구해서 수정해서 또 실패하고, 또 연구해서 또 시도하는, 이런 과정이 창조예요.
이해가 되세요?
(청중들) 예.
모방은 뒤에서 독촉을 하면 속도가 빨라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 50년 동안 압축성장을 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창조는 사유체계가 자유로워야 됩니다.
기독교 신자가 ‘하나님이 진짜 있을까?’,
불교신자가 ‘부처님은 깨달았다는데, 깨달아서 뭐하노?’
이런 생각도 해 볼 수 있어야 됩니다.
불신하라는 게 아니라 의문을 제기할 줄 알아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 정도의 사상의 자유 없이는 창조가 어렵다는 겁니다.
또 우리 사회시스템이 실패를 용납해 줘야 됩니다.
그 사람이 게을러서 실패했으면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아야 되지만
그 사람이 최선을 다했는데 실패했다면, 창조는 거의 실패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지원을 해 줘야 되는 거예요.
돈 떼먹기 위해서 투자를 실패한 게 아니고,
프로그램을 짜서 최선을 다했는데 실패했다면 그건 실패가 아니라 실험을 했을 뿐이기 때문에
그것을 기초로 해서 두 번째 실험할 수 있도록 해 줘야 된다는 거예요.
이렇게 바뀌려면 시간이 좀 걸릴까요, 안 걸릴까요?
(청중들) 걸려요.
예. 그러니까 대학교수가 여러분들 교대, 사대 선생님들에게 모방식 교육을 가르치고,
거기서 여러분들이 자격증을 따서 애들한테 모방식 교육을 하는데,
여러분들이 가르친 아이들에게서 창조력이 안 나오겠지요.
그러니까 이건 한꺼번에 해결될 문제는 아닙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는 게 창조니까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모방식 교육을 하는 짬짬이 아이들에게 실험을 해야 됩니다.
정답 찾기를 하지 말고 아이들이 이렇게도 생각해 보고,
저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안내해야 돼요.
그리고 사설학원이라는 것은 모방식 교육을 시킬 때만 필요하지,
창조적 교육을 시키면 사설학원의 기능이 저절로 없어져버립니다.
그러니까 현재와 같은 교육시스템에서는 창조력을 키우기가 굉장히 어렵지요.
그래서 대안학교 같은 곳들이 진정한 실험학교,
아이들에게 창조력을 키울 수 있는 학교로 거듭 나야 합니다.
일단 창조적 교육을 시키더라도 그 아이들에게 창조력이 키워졌는지 여부는
한 30년 후에라야 효과가 나오기 때문에 창조적 교육은 시간이 좀 걸린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한국사람들 같이 성질 급한 사람들이 그것을 기다릴 수 있을까요?
겨우 1년 해 보고 효과가 안 난다며 벌써 조바심을 내겠지요.
이렇게 제가 여러분과 대화하는 것도, 여러분들의 사유체계를 좀 더 유연하게,
자유롭게 해 주려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남자친구나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되면 ‘어떻게 네가 나를 배신할 수가 있느냐’는 생각밖에 안 하잖아요.
그래서 스님은 그 외 여러 경우의 수를 제시하는 거예요.
이런 것 자체가 창조적인 훈련이고, 교육이라 볼 수 있어요.
출처 | http://www.jungto.org/buddhist/budd8.html?sm=v&b_no=78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