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흐린 날
내 마음 속절없이
흔들리는 밤이면
달빛도 눈꺼풀 무거워
구름 속에 뒤척이고
까치는 젖은 날개를 접는다
그 날이면 소슬바람은
허공 속에 묻어두고
여명에 동트기 전
종종 걸음으로 집을 나서다
까닭 없이 현기증 일면
빈 가슴 가득 채우는
또 하나의 얼굴
잡아야 할까
버려야 할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풀잎에 걸린 하늘
바람만 옷깃을 붙잡고
나를 따른다
유인숙, 그대, 강물처럼 흘러가라
그대, 강물처럼 흘러가라
거치는 돌 뿌리 깊게 박혀
발목을 붙들어도
가다 멈추지 말고 고요히 흐르거라
흐르고 또 흘러서
내 그리움의 강가에 이르거든
잠시 사랑의 몸짓으로
애틋하게 뒤척이다 이내
큰 바다를 향하여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가라
고여 있는 것에는
순식간, 탁한 빛 감돌고
올무 감긴 물풀 어둡게 돋아나느니
내 삶의 날들이여
푸른 그리움이여
세상사 돋친 가시에 마음 다쳐
귀먹고 눈멀어
그 자리 주저앉고 싶을지라도
소망의 소리에 다시
귀 기울이며
말없이 흐르거라
울음조차 삼키는 속 깊은 강물처럼
그렇게 유유히 흘러가라
배한봉, 안개지역
습기찬 바람 속에 나는 서 있다
욕망과 어리석음으로 뒤엉킨
곧 무너질 듯 위태로운 다리 위에 나는 서 있다
눈 뜨면 안개 뿐인 이곳을
사람들은 희망을 노래하며 건너갔다
절망하면 불안 때문에 발을 헛딛게 되니까
산다는 것은 안개와 같으니까
가끔씩 구설수에 휘말리면서
싸움과 슬픔에 지친 마음들끼리 술 마시면서
주먹을 펴면 차가운 바람들만 스칠 뿐인 이곳을
나도 이제 희망을 노래하며 지나가려 한다
세계는 슬몃 태양을 밀어올리고
갓 깨어난 새들이 날아오를 때
마종기, 겨울 노래
눈이 오다 그치다 하는 나이
그 겨울 저녁에 노래 부른다
텅 빈 객석에서 눈을 돌리면
오래 전부터 헐벗은 나무가 보이고
그 나무 아직 웃고 있는 것도 보인다
내 노래는 어디서고 끝이 나겠지
끝나는 곳에는 언제나 평화가 있었으니까
짧은 하루가 문 닫을 준비를 한다
아직도 떨고 있는 눈물의 몸이여
잠들어라, 혼자 떠나는 추운 영혼
멀리 숨어 살아야 길고 진한 꿈을 가진다
그 꿈의 끝막이 빈 벌판을 헤매는 밤이면
우리가 세상의 어느 애인을 찾아내지 못하랴
어렵고 두려운 가난인들 참아내지 못하랴
오인태, 겨울 산사 가는 길
때 절은 설움 같은 건
툴툴 먼지로 털어 버리고
가자 겨울산
칡넝쿨이나 잡고 오르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세상은 한낱 굿판 같은 것일까
막소주 댓잔에 내장
뒤틀리는 속앓이
꿈결에도 목이 타는 갈증으로
됫박이나 마셔댄 새벽 냉수에
또다시 배앓이를 해야 하는
이 시대 우리들의 아픔은
엄살일까 투정으로나 볼까
망나니 칼날바람에 허리시린 잡목
여자는 허리를 따뜻하게 해야 한단다
소한까지 넘기고 몇 만 원 받는 월급날
사주팔자에도 없는 연탄 몇 장 사들인 죄로
손바닥만한 온기에 누워 죽어간 누이야
우리는 내내 이렇게 부끄러이 살아서
씻을 수 있을까 황천가는 개울물에
발이나 씻을 수 있을까
빈 맘 달래어 길을 오르면
그대 무덤없는 혼령을 위해
노승의 목탁 속에는
눈이나 내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