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문숙, 마당가의 저 나무
세상 모든 흔들리는 것들로부터 가을은 오네
마당가의 저 나무 흔들리므로 아름답네
제 몸 던지는 잎들이 저렇게 붉어지니
이제 지는 노을도 슬프지 않겠네
그건 사랑이야. 꺼지지 않는 목숨이야
바람이 중얼중얼 경전을 외며 지나가네
흔들리자, 흔들리자
세차게 흔들릴수록 무성한 날이 오겠지
나무의 기쁨이 하늘을 덮네
오래된 저 나무 흔들리므로 더욱 아름답네
김종제, 완성(完成)
열매 다 빼앗긴
은행나무의 노란 이파리가
미련없이 땅바닥을 향해
몸을 날린다
아마, 제 살점을 뜯어내어
혈서 쓰려고 하나 보다
숨을 거두며 피로써
적어 놓은 마지막 저 글자
걸음을 멈추어 서서 읽는다
세상에 몸을 부딪혀
힘들게 그가 얻어낸 것
원하는 자
누구에게든지 다 주었으므로
자랑도 하지 않고
부끄러워 하지도 않는
삶의 문을 닫고 있다
나무 하나가
이룩해 놓은 업적으로
내 눈이 맑아지고
내 가슴이 뛰고
내 발이 가뿐해지는 것이다
그가 만든 작품으로
비로소 내가 숨쉬는 것이다
육필肉筆로 적어놓고
다시 돌아오겠다는 길로
온전하게 사라져 가는 저것을
무엇이라고 읽을까
언젠가 나도 목숨 놓으면서
몸으로 글 하나 쓰고 싶다
완성(完成)이라는 글자 말이다
박영우, 길이 끊어진 곳에 길이 있었다
사람은 길로 모이고
물은 강이 되어 흐른다
사람들을 따라 길을 가다 보니
날은 어두워지고
일순간
길은 보이지 않았다
길이 끊긴 그 자리엔
남루한 삶의 그림자들이
만 갈래 삶의 옷자락을
저마다의 신열로 적시며
이제는 강물이 되어 흘러가고 있었다
최진엽, 민들레
봄은 강을 깨우고 난 봄 들에 눕네
기억한 앙갚음처럼 뛰쳐 나오네
수풀속의 가지들이, 난 봄 들에 눕네
몇 개의 아름드리 삼나무 숲을 지나거들랑
머리 풀어 헤치며 강나루에서 배를
기다릴거라 하기에 달려가네 그러나 보이지 않네
어쩌다가 발 아래 민들레가 손을 흔들며
살아가는 흰 유언을 듣네
봄은 들에 있고 난 들판을 차지하지도 못하고
키 작은 민들레 옆에서 동무가 되었네
오래 전에 흩어진 홀씨 이야기를 불러
봄은 들에 있고 난 서성이고 있네
백석, 수라(修羅)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언제인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히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