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아, 아름다운 결별
날은 기어코 저물고야 말았습니다
저무는 날은
잠자리 날개 같은 옷자락을 끌고서
게을러도 좋은 제왕처럼 왔습니다
스며든다는 것은 이런 것이군요
스며든다는 것은 저녁 어스름 같은 것이군요
연푸른 물빛에 해면처럼 잠겨서
그윽하기 낯설은 골목 같은 시간
이런 시간이면 나는
마지막 맺음이란 바로 이런가
깊이 생각할수록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지나가고 말 텐데 어쩌다가
만난 지금
무어라고 꼭 한 마디만 하라면
아름다운 결별이란 이런 것인가
생각하면 숨이 차서
입을 열 수도 없습니다
나태주, 늦여름의 땅거미
차마 빗장도 지르지 못한
대문간을 지켜 불그레
꽃을 피운 능소화
종꽃부리의 우물 속으로
빠져드는 매미 울음
마당 가 좁은 텃밭을 일궈
김장 채소 씨앗을 묻을
채비를 서두르는 아들은
나이보다 많이 늙었다
얘야, 시장할 텐데
연장이나 챙기고 밥이나 같이
먹자꾸나
저녁상을 차리는 어머니는
더 많이 늙었다
허리 숙인 담장
키 낮은 담장 너머
휘휘휘휘 키가 큰
어둠이 기웃대는 여름이라도
늦여름의 땅거미
꽈리나무 꽈리 주머니
주먹 쥔 꽈리알 속으로
스며들어가서 또
하나의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황토빛 노을
조병화, 사랑, 혹은 그리움
너와 나는
일 밀리미터의 수억분지 일로 좁힌 거리에 있어도
그 수천억 배 되는 거리 밖에
떨어져 있는 생각
그리하여 그 떨어져 있는 거리 밖에서
사랑, 혹은 그리워하는 정을 타고난 죄로
나날을, 스스로의 우리 안에서, 허공에
생명을 한 잎, 한 잎 날리고 있는 거다
가까울수록 짙은
외로운 안개
무욕한 고독
아, 너와 나의 거리는
일 밀리미터의 수억분지 일의 거리이지만
그 수천억 배의 거리 밖에 떨어져 있구나
이유식, 못 잊을 사람
소리 없이 왔다가 떠나간 웃음이 있었네
언제나 그대 곁에서 숨쉬던 나는
태평양의 물보라로 사라지고
그리움 아닌 저주도 바람에 날아
미로 위에 남겨진 수 많은 나날들
나와 즐겁다 웃어 주던 꽃
구름 따라 흘러 갔네
사랑한다 못잊는다
서녘노을에 물든 위선의 잔물결
엉금엉금 기어와
베개 밑에서 눈물짓네
오늘은 흰 쌀눈이 사랑을 실어 나르고
내일은 안개비가
방울방울 창문을 흘러 내리네
저 끝없는
기적소리는 언제 멈추려나
조두섭, 강
눈물을 가슴에 그렇게 흘리며
뼛 속 낮달까지 떠내려 보내면서
살점에 묻은 산 그늘도 씻으면서
그리운 사람 찾아가는 발걸음 소리
진실로 그리운 사람아
내 발바닥 소등처럼 굽어
바로 걸어도 바르지 않구나
멈추어도 멈추어지지 않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