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희, 그늘은 자라서 저녁이 되고
그늘은 꽃을 지나는 동안 꽃그늘이 된다
그늘은 꽃의 향기나 꽃의 아름다움보다
꽃의 몸짓에 민감하다
한떼의 그늘이 꽃을 지나
햇빛 속으로 사라진다
이 땅의 햇빛 속에서 가려져 보이지 않는
무수한 그늘들
그들은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들 속으로 들어가
꿈틀거림 만으로 존재할 수 없는
울음이 되고, 생각이 되고, 바람이 된다
햇빛이 그늘을 하나씩 풀어놓으며
제 속의 어둠을 털어낸다
그늘 하나의 행복을 붙잡고
민들레 하나 기울어진다
민들레는
어디론가 날려보내야 할 것들을
미처 날려보내지 못하고
바람이 웅성거리는 산등성이 너머로
제 키 만큼 자라있던 울음을 숨긴다
그렇게 산은 자라서
밤마다 숲 속에 꽃을 피우고
햇빛 속에 숨겨져 있던 그늘은 자라서
제 몸뚱이만한 크기의 저녁이 된다
그늘은 천천히 저녁의 이름으로
숲 속의 꽃들을 하늘 위로 밀어올린다
비로소 저녁 하늘이 환해진다
정윤천,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눈앞에 당장 보이지 않아도 사랑이다
어느 길 내내 혼자서 부르며 왔던 어떤 노래가
온전히 한 사람의 귓전에 가 닿기만을 바랐다면
무척은 쓸쓸했을지도 모를 서늘한 열망의 가슴이 바로 사랑이다
고개를 돌려 눈길이 머물렀던 그 지점이 사랑이다
빈 바닷가 곁을 지나치다가 난데없이 파도가 일었거든 사랑이다
높다란 물너울의 중심 속으로 제 눈길의 초점이 맺혔거든
거기 이 세상을 한꺼번에 달려온 모든 시간의 결정과도 같았을
그런 일순과의 마주침이라면, 이런 이런, 그렇게는 꼼짝없이 사랑이다
오래전에 비롯되었을 시작의 도착이 바로 사랑이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손가락 빗질인 양 쓸어 올려보다가
목을 꺾고 정지한 아득한 바라봄이 사랑이다
사랑에는 한사코 진한 냄새가 배어 있어서
구름에라도 실려오는 실낱같은 향기만으로도 얼마든지 사랑이다
갈 수 없어도 사랑이다
혼이라도 그쪽으로 머릴 두려는 그 아픔이 사랑이다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허영미, 눈 밖의 사랑
지난 날 더듬어
서로의 눈 안으로 들어온 사랑도 기쁨이었다가
푸르디푸른 아픔이 되기도 하는데
하물며 눈 밖의 사람, 머언 그대는
눈물인적 얼마나 많았을까
잘날 것도 못날 것도 하나 없는
사람의 마을에서
마냥 미안하고 고맙다만
인정의 꽃밭에선 모두다 연분의 꽃으로 필 수는 없어
여전히 눈 밖에서 맴돌지만
귓불에 젖어드는 선한 외 사랑의 소리
헤아려보는 밤엔
누구든 또다른 의미로 아파하지 않을 자신 있을까
가다보면 패랭이 꽃잎 비에 젖고
가다보면 달개비 꽃 파랗게 우는
가다보면 바람에 풀잎이 눕고
가다보면 망초 군락에 시린 풀벌레 소리
신경림, 파장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수 기타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권애숙, 한 때 소나기
그렇게 늘 오더라
누군가를 기다리며 혼자 중얼중얼
마루청에 누워 집을 보고 있을 때
생각없이 뒤척뒤척 먼산을 파고 있을 때
느닷없이 후두둑 쾅쾅 사방을 두들기는
사랑, 혹은 이별
마당가에 흥건히 붉은 봉숭아꽃물을 찍어대며
그렇게 기습적으로 와서 전부를 흔들더라
깃털 다 젖은 새처럼 할딱거리며
우왕좌왕 비에 젖어가는 것들
거두어 들이다 보면
설레이던 처음은 얼룩만 남긴 채
분분히 사라지고 깊이 패인 물웅덩이만
울먹거리고 있더라
사랑아, 한 때 소나기
그렇게 너는 우레로 왔다 가고
미처 개켜들이지 못한 옷가지로
후줄근하게 젖은 나는
바지랑대 높이 걸려
사지를 늘어뜨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