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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투더코아의 詐欺 列傳]44.유경.숙손통열전(劉敬.叔孫通列傳)
게시물ID : history_1709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투더코아
추천 : 4
조회수 : 110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7/15 01:33:28
투더코아의 詐欺 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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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daum.net/carilla
 
*유경.숙손통열전(劉敬.叔孫通列傳)
 
일전에 말했듯이 고조는 말등위에서 천하를 얻었으나 말등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었다.
고조가 천하를 평정할때는 말달리고 수레를 모는 억센 장수들의 힘이 매우 컸지만
천하를 얻은후에 그러한 장수들은 예의를 모르고 법도에 밝지 못하여 나라를 다스리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만약 하늘의 도를 역설하여 만세의 평안을 이룬 신하들이 없었다면 고조의 한나라도
진나라처럼 오래 가지 못하고 망해버렸을지도 모른다.
 
대업을 이루는것이 어찌 혼자의 힘으로 되었겠는가?
여러 유능한 인재를 얻어 한나라의 법과 제도를 세워나가니
이는 태평성대를 열고 만세를 이끌어나갈 기틀이 되었다.
 
완강한 호족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관중에 도읍의 터전을 만들고 흉노와 화친을 맺었으며
조정의 의례를 밝히고 종묘의 제법을 제정했다.
지금부터 유경과 숙손통의 이야기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대직약굴 도고위사(大直若詘 道固委蛇)
 
누경(婁敬)은 제나라 사람이다.
한 5년에 그가 농서지방에 수비병으로 가다가 길에서 우연히 고조의 행차를 만났다.
누경은 짐수레를 팽개치고 양가죽 옷을 입은채 우장군에게 소리쳤다.
"폐하를 뵙고 할말이 있소."
우장군이 살펴보니 더러운 양피가죽 옷을 입은 꼴이 거의 거지의 모습이었다.
"폐하를 만나려면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오시오."
"복장보다 중요한것은 나의 정신이오.
베옷을 입으면 어떻고 비단옷을 입으면 어떻다는 말이오?
나는 결코 옷을 갈아입지 않을것이오."
우장군은 어쩔수 없어 고조에게 고했다.
고조가 누경의 모습을 보고 우장군에게 말했다.
"저런 거지를 어째서 내게 소개시키는거요?"
"정신은 있는듯 하니 한마디 듣는척이라도 해 주십시요."
고조가 접견을 허락하고 누경을 불러 만났다.
 
누경이 고조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폐하께서 낙양에 도읍하려 하시는것은 주왕실과 융성함을 다투려 하는것입니까?"
"그렇다."
"폐하께서 천하를 취하신 방법은 주왕실과는 다릅니다.
주나라의 선조는 후직으로 요임금이 태에 봉했습니다.
10여 대를 지나면서 덕을 쌓다가 걸왕을 피해 빈으로 이주했습니다.
후에 다시 오랑캐의 침입으로 빈을 버리고 말채찍을 휘둘러 기산 밑으로 이주하자
백성들이 앞다투어 그 뒤를 따랐습니다.
이윽고 문왕이 서백이 되어 천명을 받기 시작하자
강태공 여상과 백이 등이 동해의 바닷가에서 달려와 귀의했습니다.
문왕의 아들 무왕이 마침내 은왕 주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니
약속하지 않았음에도 8백의 제후들이 맹진의 회맹에 참석하여 결국 은나라를 멸했습니다.
어린 성왕이 즉위하자 주공과 같이 어진 사람들이 성왕의 스승이나 재상이 되어 보필하고
이어서 성주에 낙읍을 건설했습니다.
이곳은 천하의 중심이라 사방의 제후들이 공물을 바치기에 거리가 비슷하여
덕이 있는 자는 왕 노릇을 하기 쉽고 덕이 없는 사람은 망하기도 쉽습니다.
그런 낙읍에 성을 쌓아 머물렀던 이유는 주나라 왕들로 하여금 힘써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감화시키기 위해서이지
험애에 의지해서 교만하고 사치한 풍조로 백성들을 학대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나라가 흥성할 때는 천하가 화합했고 사이 들까지 교화되어 의를 숭상하고 덕을 그리워하며
일치단결하여 천자를 함께 받들었습니다.
사방의 이족이 세운 나라들 중 복종시키지 않은 나라는 하나도 없었고
주나라에 조공을 바치거나 부역을 바치지 않는 나라도 없었습니다.
이윽고 주나라가 쇠퇴하자 서주와 동주로 분열되었고 천하에서는 아무도 조공을 바치지 않았음에도
주나라는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덕이 박해서가 아니라 형세가 쇠약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폐하께서는 풍패 에서 몸을 일으켜 군사3천을 수습하여 곧바로 진격하여
촉한을 석권하시고 다시 관중으로 나와 삼진을 평정했으며
항우와 형양에서 싸워 성고 의 어귀를 두고 다투면서 대전은70회 소전은40회를 치루어
천하의 백성들 간과 뇌가 쏟아져 길바닥을 흥건히 적셨습니다.
또한 들판에 딩굴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해골은 이후 헤아릴 수 없이 많아
그것을 슬퍼하는 곡성 소리는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부상자들은 아직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음에도
오히려 주나라가 가장 융성해진 성강 의 치세 때와 비교하려고 하십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두 나라는 나란히 놓고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진나라의 땅은 산과 하수를 두르고 있어 사방이 견고한 요새이니
갑자기 나라에 위급한 일이 생기면 백만의 군사를 갖출 수 있습니다.
진나라 땅의 견고한 산천에 의지하고 기름진 땅을 자산으로 삼을 수 있으니
이야 말로 하늘이 내려준 부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 관중으로 들어가 도읍을 삼게 되면 산동에서 비록 난이 일어날 지라도
진나라 땅만은 험한 산천에 의지하면 온전히 보전할 수 있습니다.
무릇 다른 사람과 싸울 때 상대방의 멱살을 잡아쥐고 등짝을 후려치지 않고서는
싸움을 온전히 이길 수 없습니다.
오늘 폐하께서는 관중으로 들어가 도읍을 정하시어 진나라 땅의 험한 산천에 의지한다면
그것은 바로 천하의 멱살을 잡고 등을 치는 격입니다."
 
고조가 확신이 서지 않아서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자 고향이 모두 산동 출신의 신하들은
낙양은 수백 년 동안의 주나라 왕들이 도읍했으며 관중에 도읍한 진나라는2세 만에 망했다고 하면서
주나라를 본받아 낙양에 도읍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조는 결국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유후 장량이 관중으로 도읍을 정해야 한다는 단호한 말을 듣고 그날로 거마를 움직여 관중으로 들어가 도읍을 정했다.
 
후에 고조가 말했다.
"진나라의 옛 땅에 도읍해야 한다고 말한것은 누경이다.
누 는 유 와 통하니 앞으로 누경을 유경 이라고 불러라."
고조가 누경에게 유씨 성을 하사하여 그때부터 누경은 유경 이 되었다.
또한 유경을 낭중에 임명 하여 봉춘군 이라 칭했다.
 
한나라 7년.
한왕신이 모반하자 고조가 친정하여 진양성에 이르렀다.
한왕 신이 흉노와 힘을 합쳐 한나라를 공격하려고 한다는 첩보를 받고 대노한 고제가
사자를 흉노에 보내 정탐해오도록 시켰다.
흉노가 건장한 군사들과 살찐 말들을 숨겨놓고 단지 노약자와 비루먹은 가축들만을 보여주었다.
사자들이 따로 10여차례나 흉노진영에 다녀왔음에도 한결같이 흉노를 칠 수 있다고 말했다.
고조가 다시 유경을 흉노에 사자로 보냈다. 유경이 돌아와 고했다.
"두 나라가 서로 공격할때는 마땅히 자신들의 장점을 부풀려 보여주는 법입니다.
오늘 신이 가보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비루먹은 가축과 노약자들 뿐이라.
이는 그들의 단점을 일부러 보여주어 우리 한군을 유인하여
매복전으로 승리를 취하려는 기병계가 틀림없습니다."
 
 
이때는 이미 한나라 군사20만 명은 구주산을 넘어 흉노 땅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황제가 노하여 유경에게 욕지거리를 하며 꾸짖었다.
"제나라의 포로 놈아
세치 혓바닥으로 벼슬을 얻더니 오늘은 망언으로 우리 군사들의 진군을 막는구나."
그리고는 유경을 차꼬와 수갑을 채워서 광무에 가두었다.
고조가 계속 진군하여 평성에 이르렀을 때
고조의 한군은 평성의 백등산에서 흉노의 기병에 의해 포위되었다가
7일 만에 간신히 포위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고조가 광무로 돌아와 유경을 사면하고 사과하며 말했다.
"내가 공의 말을 듣지 않아서 평성에서 곤경에 처했다.
내 이미 흉노를 쳐야 한다고 고한10명의 사자를 모두 처형했다."
그리고는 유경을2천 호에 봉하고 관내후의 작위와 함께 건신후 라는 봉호를 내렸다.
고조는 평성에서 철군하여 장안으로 돌아왔고 한왕 신은 흉노로 달아났다.
 
그 당시 흉노의 대선우 모돈은 강력한 군사30만을 이끌고 빈번히 중국의 북쪽 변경을 괴롭혔다.
고조가 걱정하여 유경에게 대책을 물었다.
"오랑캐를 달랠 방법이 없겠는가?"
유경이 대답했다.
"천하가 비로소 안정되었으나 군사들이 전투에 지쳐있음으로 무력으로는 흉노를 복종시킬 수 없습니다.
모돈은 그의 부친을 시해하고 스스로 선우의 자리에 올라 부친이 거느린 여러 부인들을 취하고
힘으로써 위엄을 세우고 있으니 인의로써 설복시킬 수 없습니다.
오로지 그의 자손들을 영원히 한나라의 신하로 만들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그렇게 하시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진실로 그와 같은 일이 가능하다면 어찌 할 수 없겠는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폐하께서 만일 적실의 장공주를 모돈의 부인으로 보내면서 후한 예물을 내려준다면
한나라의 적실 공주와 후한 예물을 본 모돈은 비록 오랑캐 이지만 필시 공주를 사모하여
선우의 정비인 연지로 삼고 후에 아들을 낳으면 태자로 삼아 자신의 뒤를 잇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한나라의 예물을 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는 매년 때가 되면 한나라에서는 남아도는 물건이나 흉노에서는 부족한 물품을 수시로 보내
위문을 하고 동시에 변사를 보내 그들에게 예절을 가르치게 하십시오.
모돈이 살아있을 때는 사위가 되고 그가 죽으면 외손자가 선우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저는 아직까지 외손자가 감히 외조부에게 결례를 했다는 일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군사를 내어 싸우지 않고도 점차적으로 신하로 삼을 수 있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장공주를 보낼 수 없어 종실이나 후궁 중에서 뽑아 공주라고 말하게 된다면
언젠가는 그들도 알게 되어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곁에 두지 않게 될 것이니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좋은 계책이오."
그래서 고조가 장공주를 흉노로 보내려고 했으나 여후가 날마다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첩에게는 하나 밖에 없는 딸을 어찌 흉노에 내다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고조가 결국 장공주를 흉노로 보내지 못하고 종실 중에서 한 명을 골라 장공주라고 꾸며
선우의 부인으로 보냈다.
유경이 사자로 가서 혼인으로 화친을 맺도록 했다.
사자의 임무를 띠고 흉노를 다녀온 유경이 복명했다.
"흉노의 백양왕과 누번왕이 살고 있는 하남지역은 장안에서7백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경기병으로는 하루 낮과 밤이면 관중에 당도할 수 있습니다.
관중은 최근에 전화를 입어 백성들은 적지만 땅은 비옥하여 백성들을 이주시켜 더 채울 수 있습니다.
무릇 제후들이 처음 일어설 때 제나라의 여러 전씨들과 초나라의 소.굴.경.씨 등의 협조가 없었다면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비록 관중에 도읍을 정하시고 계시지만 실제적으로는 인구가 적습니다.
북쪽으로는 흉노의 외적과 가깝고 동쪽으로는 세력이 강한6국의 종족들이 여전히 남아있어
어느 날 아침 변란이라도 일어난다면
폐하께서는 베개를 높이 베고 침상에 누워 잠을 편히 주무실 수 없게 됩니다.
바로옵건대 폐하께서는 제나라 지역의 여러 전씨들과 초나라의 소.굴.경. 등의 세 종족과
연.조.한.위. 등의 후예들과 호걸 및 명가를 관중으로 이주시키십시오.
그렇게 하여 나라에 일이 없을 때는 흉노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고,
제후들이 난을 일으켰을 때는 역시 충분한 병력으로 동쪽으로 나아가 토벌할 수 있습니다.
이는 나라의 근본을 강하게 하게 말단을 약화시키는 방법입니다."
"훌륭한 계책이오."
그리고는 즉시 유경을 책임자로 임명하여 그가 말한대로10여 만의 호구를 관중으로 이주시켜
뒷날의 후환을 미연에 방지 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숙손통(叔孫通)은 설 땅 사람이었다.
진나라때에 학문이 뛰어나다 하여 조정에 불리어 가서 박사관에 임명될 예정으로
조서를 기다리며 몇년을 머물렀다.
그때에 산동에서 진승등이 봉기하자 사자들이 와서 그 소식을 급히 전했다.
크게 놀란 2세황제가 박사관과 유지들을 불러 물었다.
"초나라 국경을 지키던 병사들이 기현을 공격하고 진성으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인가?
여러 공들은 어떻게 생각하오?"
대전에 모인 30여명의 학자들이 나서서 이야기 했다.
"그러하옵니다.
이것은 반란이옵니다.
신하된자로 반란을 일으킨다는것은 대역의 죄이니 폐하께서는 즉시 군사를 내어 그들을 토벌하십시오."
 
반란이라는 말을 들은 2세황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때 분위기를 살피던 숙손통이 나서서 말했다.
"여러 유생들은 모두 틀렸습니다.
천하가 이미 통일 되어 무기를 모두 녹여 버리고 군현의 성벽을 허물어 버렸으며
명철하신 황제께서 군림하시며 명을 분명히 했는데 어찌 감히 반란을 도모하는자가 있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쥐새끼처럼 좀도둑질이나 하는 떼거리에 지나지 않을것이니
조정에서 거론할 가치도 없습니다.
이제 각군의 현령과 위관들이 그자들을 모두 잡아 논죄 할것이니
폐하께서는 과도히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2세황제는 숙손통의 말을 듯고 매우 기뻐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졌다.
"짐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신하들은 불충한 자들이니 도둑이라는 말을 쓴자는 모두 용서하고
반란이라고 말한자들은 모두 잡아 형리에게 넘겨 치죄하라."
 
형리들이 유자들을 사정없이 잡아들였다.
숙손통은 2세의 칭찬을 받고 비단20필과 의복을 하사받고 그자리에서 박사관에 임명 되었다.
숙손통이 궁에서 물러나와 박사관저로 돌아갔을때 여러 유생들이 그를 비난했다.
"선생의 아첨은 참으로 대단하오.
어찌 그리 새빨간 거짓말을 하여 다른 사람들을 곤란하게 한단말이오?"
그러자 숙손통이 되받아 말했다.
"모르는 소리 마시오.
내가 아니었으면 그대들도 호랑이의 이빨속으로 들어가 살아나오지 못했을 것이오.
아쨌든 모두 빨리 도망치시오.
여기서 꾸물거리다간 모두 살아남지 못할것이오."
 
말을 마친 숙손통은 그 즉시로 도망쳐서 설 땅으로 가 버렸다.
설 땅은 이미 초군이 점령한 상태였다.
설땅에 항량이 있었으므로 숙손통은 항량을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항량이 정도의 싸움에서 패하여 죽었으므로 이번에는 초회왕을 따르기로 하였다.
그러다가 회왕이 의제가 되어 장사로 옮겨갈때 숙손통은 그대로 남아 항우를 섬기기로 하였다.
 
한 2년
한왕이 여러 제후들을 거느리고 팽성으로 입성하자 숙손통은 한왕에게 항복해 버렸다.
한왕이 또 패전하여 서쪽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숙손통은 이번에는 한왕을 배반하지 않고 계속 한왕을 섬겼다.
 
숙손통은 원래 유복을 입고 있었는데 한왕 유방은 그 복장을 매우 싫어했다.
그것을 안 숙손통은 즉시 초나라 풍속의 짧은 옷으로 바꿔 입었고 한왕도 그것을 좋아했다.
 
숙손통은 한왕에게 항복할때 백여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한왕이 숙손통에게 명하여 제자들중 재능 있는자를 추천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숙손통은 제자를 한명도 추천하지 않고 오히려 도적떼 출신이나 힘깨나 쓰는 자들만을 추천 했다.
 
제자들의 불평이 터져 나왔다.
"저희는 여태 선생을 믿고 따르다가 이제 다행히 한왕을 섬기게 되었는데
선생께서는 어째서 저희를 추천해 주지 않으시고 도적떼 들만 추천하시는지 알수가 없습니다."
숙손통이 제자들을 굽어보며 말했다.
"너희는 모르는 소리 말고 있으라.
시석이 난무하는 전쟁중에 너희같은 유자들의 재주는 쓸데가 없다.
적장을 베고 싸움에 이기는것은 너희가 도적떼만 못하기때문에 너희를 추천하지 않은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잊고 있는것은 아니니 좀더 기다려 보아라."
그 말을 들은 숙손통의 제자들은 스승의 말에 감복하고 물러났다.
 
한5년
천하가 통일되어 제후들이 한왕을 높여 정도에서 황제의 위에 오르게 했다.
숙손통이 황제의 취임의식과 칭호등을 마련 하였다.
고조는 진나라의 번거로운 제도와 의례를 모조리 폐지하고 법령을 간단하고 쉽게 고치게 하였다.
그랬더니 뭇 신하들이 술에 취해 큰소리로 전공을 다투고 칼을 뽑아 궁전의 기둥을 내려치는등
난장판이 되는 일이 허다했다.
 
고조는 그런 꼴을 볼때마다 한심하여 불평섞인 말을 하곤 하였다. 
"이게 무슨 나라 꼴인가!
무뢰배 소굴이 따로 없구나."
그때 옆에있던 숙손통이 고조에게 아뢰었다.
"대저 유자란 진취 하는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으나 이룬것을 지키는데는 유용합니다.
신이 제자들과 함께 노나라의 학자들과 더불어 조정의 의식을 제정하고자 하오니 윤허하여 주십시오."
 
고조는 기뻐하며 그 일을 시험삼아 해보도록 허락하였고
숙손통은 노나라로 가서 유학자 30여 명을 초빙했다.
그런데 그 유학자들중 두명이 초빙을 거절하였다.
"그대가 섬긴 군주가 열명은 족히 될것이오.
그대가 그 군주들에게 아첨하여 귀히 쓰였다는것도 다 알고 있소.
이제 비로소 천하가 안정 되었으나 시체들은 아직 매장되지 못하고 길에 뒹굴고 있으며
부상자들은 아직도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러한 때에 새 왕조를 위한 예악을 일으킨다 하니 가소롭기 그지 없구려.
예악이란것은 그 왕조가 덕을 쌓아 백년이 지난뒤에라야 비로소 스스로 일어나는것이오.
그대가 하려는 일은 옛 법에 맞지 않으니 우리는 가지 않겠소.
그대는 우리들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고 그만 돌아 가시오."
숙손통은 그들에게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시대가 변한것도 모르는 참으로 비루한 유자들이로다."
 
숙손통은 노나라 학자들을 데리고 와서 자기 제자들과 함께 궁중의 예의를 제정하는데 힘썼다.
예악이 모두 만들어지자 여러 신하들을 동원하여 연습을 시키고 드디어 고조의 앞에서 시연을 하였다.
고조가 매우 흡족해 하였다.
 
한 7년
때맞추어 장락궁이 완성되어 제후와 만조백관이10월에 모두 입조 하였다.
의식은 새벽부터 시작 되었다.
날이 밝기 전에 조회에 참석하는 자들이 차례로 궁궐 문을 통해 들어왔다.
궁의 뜰에는 거마.기병.보졸 등을 시켜 궁궐을 호위하게 하고 각종 병장기와 깃발과 휘장을 세웠다.
전령이 구호를 외쳤다.
'뛰어서 가라'
그러자 모두 걸음을 빨리 했다.
궁전 아래에는 낭중들이 계단마다 수백 명씩 도열했다.
공신들과 제후.장군들.군리들이 순서에 따라 서쪽에 도열하여 동쪽을 바라보고
승상 이하 문관들은 동쪽에서 서쪽을 바라보며 도열했다.
대행이 9명의 관리를 데리고 황제의 명령을 전달했다.
이윽고 황제가 봉련을 타고 임하자 백관들은 기치를 들어 정숙한 자세를 취하고
제후 이하6백석 이상의 관리들을 인도하여 순서대로 하례를 올렸다.
이렇게 하자 제후왕 이하 그 누구도 두려움에 떨며 숙연한 자세로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윽고 의례가 끝나고 주연이 시작되었다.
전당 위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가 존비의 순서에 따라 일어나
황제에게 축수했다.
이윽고 술잔이 아홉 번 오고 간 뒤에 알자가 "주연을 파한다"고 외쳤다.
어사가 법을 집행하여 의식을 위반하는 자들을 가차없이 끌고 나갔다.
정식의 의례를 끝내고 다시 주연을 열어 즐겼는데 아무도 감히 시끄럽게 굴어 예를 범하는 자가 없었다.
이에 고제가 말했다.
"짐은 오늘에서야 황제가 존귀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조는 숙손통을 태상에 임명하고 황금 오백근을  하사했다.
숙손통이 기회를 보아 고조에게 아뢰었다.
"이 의례는 저 혼자 만든것이 아닙니다.
저를 따라 고생한 제자들이 많사오니 그들에게도 관직을 내려주시옵소서."
고조가 허락하여 제자들 모두에게 낭관 벼슬을 주었다.
숙손통이 궁에서 퇴출하여 제자들에게 벼슬이 내렸음을 알리고
500근의 황금을 풀어 제자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제자들이 모두 기뻐하며 말 했다.
"숙손선생은 참으로 성인이시다.
당세에 중요한것이 무엇인지 모두 알고 계시는 분이다."
 
한 9년.
고조가 숙손통을 황태자의 태부로 삼았다.
한 12년.
고조가 황태자를 폐하고 조왕 여의를 황태자로 세우려 했다.
숙손통이 간했다.
" 진(晉)헌공이 여희에게 빠져 태자 신생을 폐하고 해제를 세워
그 결과 진나라는 수십 년간 혼란에 빠져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또한 진(秦)나라는 일찌기 부소를 태자로 정하지 않아 조고로 하여금 사술을 부려
호해를 황제로 세우게 하여 결국 제사마저 끊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 일은 폐하께서 직접 보신 일입니다.
지금 태자가 어질고 효성스럽다는 사실은 천하가 모두 들어 알고 있습니다.
또한 여후께서는 폐하를 따라다니면서 고생을 참고 견디며 보잘 것 없는 음식을 먹으며 살아왔는데
어찌 버릴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반드시 적자를 폐하고 어린 아들을 세우시려고 하신다면 바라건대 신을 먼저 죽이십시오.
저의 목에서 흘리는 피로 땅을 적시게 하시옵소서."
그러자 고조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공은 그만 하시오. 내가 농담 한 번 해봤을 뿐이오."
"농담이라니요
황태자는 천하의 근본입니다.
근본이 흔들리면 천하가 흔들릴것인데 어찌 천하를 가지고 농을 하십니까?"
"아아. 알겠소 그대의 말대로 하겠소."
그후 고조는 장량의 계책으로 태자를 갈아치울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고조가 붕어하효혜제가 즉위 했다.
혜제가 숙손통을 불러 말했다.
"선제의 원릉과 침묘를 참배하는 의례를 아는 자가 그대 말고는 아무도 없소."
혜제는 숙손통을 태부에서 태상으로 옮기도록 해서 종묘에 대한 의례를 제정하도록 했다.
결국 한나라의 여러 의례에 관한 규정이 정해진것은 모두 숙손통이 태상으로 있으면서 세운 공이다.
혜제가 동쪽의 장락궁에 기거하고 있는 여태후에게 문후를 드리며 오가다가
사람들의 통행을 막아 번거롭게 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래서 복도를 만들기 위해 공사를 시작했다.
숙손통이 기회를 보아 그 일에 관해 상주했다.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고조의 묘 위로 복도를 만드십니까?
고묘는 한나라를 일으킨 시조의 묘인데 어찌하여 후세의 자손들로 하여금
종묘의 위를 밟고 다니게 할 수 있습니까?"
혜제가 크게 두려워하며 말했다.
"뭐요?
복도가 종묘의 위로 지나간다는 말이오?
이거 야단 났구려. 빨리 허물어버리시오."
"군주의 잘못은 드러내지 않는 법입니다.
공사는 이미 시작되어 백성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건물을 부셔버리면 그것은 황제의 잘못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원래의 사당을 위수 북쪽에 따로 크게 지으십시오.
종묘를 넓히고 많이 짓는 일은 큰 효도의 근본입니다."
황제가 해당 관리에게 명을 내려 사당을 짓도록 했다.
사당이 완성되자 복도는 그대로 남게 되었다. 
혜제가 일찍이 이궁으로 놀이를 나가게 되었을 때 숙손통이 말했다.
"옛날에는 봄이 되면 햇과일을 종묘에 바쳤습니다.
지금 버찌가 잘 익어 종묘에 바칠만 합니다.
원컨대 폐하께서 놀이를 나왔으니 앵두를 가지고 돌아가셔서 종묘에 바치십시오."
황제가 허락하여 버찌를 따서 종묘에 바쳤다.
이로써 여러 과일들을 제사상에 바치는 일이 이때부터 시작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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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은 이 글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평 하였다.
 
옛말에 ㅡ천금의 털옷은 한마리 여우의 겨드랑이 털로 만들수 없으며
높은 누각의 서까래는 한개의 나뭇가지로 만들수 없다고 하였듯이
하.은.주 3대의 융성은 지혜로운 한두 사람의 머리로 이루어 진게 아니다ㅡ 라고 되어있다.
참으로 그러하다.
 
고조는 미천한 신분에서 일어나 천하를 평정 했으니
그의 모계나 용병술은 더할나위 없이 비상하였다고 할수있다.
그러나 유경이 짐수레를 팽개치고 뛰쳐나와 천도를 역설하여 만세의 평안을 가져온것을 보면 지혜란 역시 한사람의 전유물이라고 할수 없다.
 
숙손통은 세상에서 잘 쓰여지기를 원해 제 임무를 찾아내어 예의를 제정 하고
자신의 진퇴도 시세의 변화에 맞추어 드디어 한 제국의 유가의 대종이 되었다.
ㅡ참으로 바른것은 굽은것처럼 보이며 도라는것은 원래가 구불구불한것ㅡ 이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이와 같은 경우를 두고 한말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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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유경과 숙손통의 이야기를 모두 알아 보았다.
 
유경은 낙양의 화려함과 안락함에 도취되어 그곳에 머무르려 하는 고조를 분발하게 하고
장안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여 한나라가 만세토록 평안할수 있는 기틀을 세우게 하였다.
비천한 짐꾼의 신분으로 황제의 행차를 만나 두려움없이 황제에게 유세하여 일약 열후의 반열에 서고
황제의 성을 하사받아 유씨가 되었다.
 
흉노를 안정시킬 계책을 세우고 수도 장안의 인구를 늘리기 위하여 각 제후국의 유력한 가문을 이주시켜
나라의 근본을 강화하고 말단을 무력하게 하였으니
유경이야말로 한 제국 초기에 국가를 안정시킬 기틀을 세웠다 할수있다.
 
숙손통은 유자로서 옛 예악과 법도에 정통하여 한나라가 무질서한 신흥 무력국가에서
법통과 질서를 아는 당당한 대제국으로 거듭날수 있도록 수많은 제도를 마련 하였다.
 
당시에도 고리타분하고 에절에 얽매여서 쓸모가 없다고 평가되던 유자의 신분이었지만
시류를 잘 알아서 행동을 시의적절하게 함으로서 모든 일을 때에 맞춰 성공시킨 공로가 크다 아니할수 없다.
 
무력으로 세운 한나라를 예악과 덕으로 다스릴수 있게 변모시킨것은 모두 숙손통의 공로이니
황제의 존귀함을 만천하에 드날리어 황제조차도 감탄하여 마지 않게 하였다.
 
숙손통은 처음에 진나라에 출사했고 항씨와 초회왕을 번갈아가며 섬기는등 주군을 여러번 바꾸었다.
당시의 가치관으로서는 그가 지조없는 행동을 한것이라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사마천도 그를 ㅡ세상에 잘 쓰여지기 위해 자신의 진퇴를 시세의 변화에 맞추었다ㅡ고 평했듯이
참으로 시의성을 잘 아는 선비였다 할수 있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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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없이 자기의 뜻을 밝히고 시세의 변화에 맞추어 자신의 진퇴를 결정하는것이
요즈음 세상의 현명한 자라 할수있을듯 하다.
이는 옛 공.맹의 시대 이전부터 모든 현명한 자들의 바라는 바 였고
지금까지도 바른 삶을 살고자 하는이들이 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당금의 세태는 그러한 삶을 살고자 하는이들을 실망시키는 일이 너무도 많은듯 하다.
차떼기의 주범이요 공작정치의 달인이 안기부장의 물망에 오르내리고 있다.
제자의 논문을 훔치고 그 논문으로 상금과 연구비를 받아 가로챈,
참으로 도적이라고 할수밖에 없는자가 교육부 장관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국가는 국민들이 보고 배울수 있는 모범을 보여주어서 국민들이 그들을 따르고 본받아 바른 삶을 살도록
해야하는 의무가 있음에도
오히려 도적질을 하고 정치공작을 벌이는 모리배가 되어야만 살아남을수 있고
권력자의 눈치를 살펴 아부해야만 출세하고 성공할수있는 기회주의적 삶을 살아온 사람들을
표본으로 내세워 우리국민들이 그것을 본받고 따라 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이것은 국가도 아니요 그저 무뢰배의 소굴일 뿐이다.
 
이 나라에 누가 있어 나라의 기풍을 바로 잡고 양심과 도덕으로 살아갈수있는 세상을 만들것인가?
그러한 영웅호걸을 기대해야만 하는 나약한 현실에 한숨이 쏟아지는것을 금할 길이 없다.
 
노나라의 유학자는 한 나라의 예악이 바로 서려면 덕을 쌓아 백년이 지나야만 스스로 예악이 바로 설것'
이라 하였는데
이제 우리 나라는 언제나 예악이 바로서고 양심과 도덕이 바로서는 나라가 될것인지
답답한 가슴을 가누지 못하는 참담한 심정으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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