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강, 그대 손길처럼
창틈으로 숨어오는 새벽바람이
그대 손길처럼 부드러워
외등 불빛의 유혹으로
창문을 열어 그대 숨결 맞이하네
말없이 열리는 나의 하늘은
구슬처럼 빛나는 마음 하나로
영글게 웃음 띄어 보이네
남겨진 시간 앞에서 가여운 가슴으로
오래 지키고 싶어지는 사랑
초라하지 않게 꽃을 피워내는 연륜이
저문 하늘의 열정을 기억하듯
속삭이는 들꽃 잎 사이로 일렁이는
솔바람 같은 사랑이라 해도
지나치는 시간들이 서러워
미리 주저하지 말라 하네
침묵으로 울리는
은은한 종소리가 되자 하였네
김윤진, 청춘 연가
꽃잎에 촉촉이 옹글진 이슬처럼
교내 작은 숲엔 속삭임이 있었네
꽃가루 흩날리듯 사랑은 나부꼈지만
건초더미만 무성했던 숲길
파릇하게 새순 돋아난 어린나무
뿌리째 다가서는 망울 하나
우린 그렇게 만났었네
캠퍼스 가득 울리는 음악처럼
멋모르게 퍼져가는 환희
나실 나실 여윈 청춘이었지
그것이 사랑이었구나
꽃향기만으로도 활활 타오를 듯
동화 속 스냅사진 두어 장처럼
노래 한 소절 합창하곤
새털구름처럼 숲길 저편으로 흘러간
먼 훗날 만날 수 있을 거라
막연히 여겼거늘
그것이 작별이 되었구나
숲길은 멀고 깊은 줄 알았는데
어느덧 노을빛 바닷가
아스라이 새벽 물안개처럼 희미해진
내 청춘의 노래 한 소절 같은
그런 사랑이 내게 있었네
김종제, 바람이 불다
내가 기다려 온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궁금하였는데
어제부터 광풍 같은 봄바람이 불었다
바람 불 때마다
당신이 왔다
당신 닮은 사랑이 넌지시 다가왔다
오랜 소망의 바람이었다
기필코 내가 건져야 할
세상이 그속에 있었다
처음에는
내 가슴속 창문을 손으로 두들기더니
이윽고 머릿속 지붕을 발로 걷어차더니
뿌리 채 뽑힌 나의 손목을 잡고
마침내 어디론가 데려가고 있었다
아직 상처 아물지 못한
검은 산
아직 마음 속의 화 풀리지 않은
붉은 강으로
내가 바람처럼 휩쓸려 가고 있었다
내가 당신에게 바람이었나
저것, 저것이 세차게 불어야
꼿꼿하게 저항하며 일어설 수 있다고
아직 몸 바꾸지 못한 풀에게
아직 몸 풀지 못한
물에게 가서 흔들어 줘야
당신 같은
사랑 하나 제대로 얻을 수 있다고
안재동, 별이 되고 싶다
별이 되고 싶다
살아서 별이 되고 싶다
언제나 너의 눈에 잘 띄는
밝고 아름다운 별이 되고 싶다
별이 되고 싶다
죽어서도 별이 되고 싶다
언제나 너의 모습 지켜주는
크고 영롱한 별이 되고 싶다
나는 그런 너의 별이 되고
너도 그런 나의 별이 된다면
너와 나의 아름다운 사랑이
별처럼 빛이 날 수 있다면
별이 되고 싶다
밤하늘의 별이 되고 싶다
너에게서 가장 가까운 곳에
푸른 하늘의 별이 되고 싶다
서안나, 나는 어느 봄날 길을 건너다 깨닫는다
봄날
중풍으로 몸 반쪽이 굳어버린 노인이
횡단보도를 힘겹게 건너고 있다
살아 있는 몸이 죽은 몸을 끌며
세상을 건너고 있다
지팡이를 짚고
허공에 굳은 몸을 뻗으면
꽃잎처럼 무너져 내리는 거리
살아 있는 몸이 움직이면 죽은 몸이 따라오고
이끄는 기억과 이끌리는 기억들
삶과 죽음이
노인의 몸 안에 경계가 되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나는 어는 봄날 길을 건너다 엿본다
길고 긴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노인네
삶과 죽음의 문턱을 오가는
몸 안이 저승이고 몸 안이 삶이다
횡단보도 위에서
노인의 몸이 봄꽃처럼 피었다가 지는 소리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