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의 종말이 채 20일도 안 남았던 1979년 10월9일 내무부 장관 구자춘은 기자회견을 열어 경찰이 “북괴의 폭력에 의한 적화통일혁명노선에 따라 대한민국을 전복,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전위대”인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이하 남민전)라는 불법불온단체의 전모를 파악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남민전이 북의 지령을 받지 않는 자생적 공산주의 조직이라고 했지만, 속칭 반체제와는 성격이 완전히 판이하다고 강조했다.
남민전 사건은 유신정권뿐 아니라 일반 국민, 나아가 당시의 ‘반체제’ 재야인사나 청년학생들에게도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남조선’이라는 명칭, 북의 김일성에게 ‘피로써 충성을 맹세’하는 서신을 보냈다느니, ‘남조선해방전선기’를 걸어놓고 칼을 잡고 가입선서를 했다느니, 총기와 폭약을 준비했고 실제로 무장조직을 만들어 재벌집을 털었다느니 하는 발표 내용은 남민전이라는 이름의 조직이 기존의 민주화운동 선상에 출현했던 여러 조직이나 운동 행태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조직의 구성에서도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주력하는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민투)와 반제투쟁까지를 목표로 한 남민전의 이원조직을 만들고, 민투의 ‘투사’로서의 활동을 일정 기간 검열하여 남민전의 ‘전사’로 승격시키는 방식도 기존의 민주화운동에서는 보기 힘든 방식이었다.
이재문과 전창일과 김병권의 운명
민주화운동 진영 내에서도 반응은 냉담했다. 사건이 터진 시기는 와이에이치(YH) 사건을 겪고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총재직무 정지 가처분 신청이 인용되고, 2학기 개학 이후 대학가에서 자연발생적인 데모가 일어나는 등 반유신 투쟁이 달아오르기 시작할 때였다. 재야세력 내에서는 남민전 사건의 발표가 막 달아오르기 시작한 민주화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것으로 생각했다. 남민전의 일원이었던 임헌영은 사건 발생 직후 “어제까지 동지였던 사람들조차도 차갑게 눈길을 아래로 깔아야만 했던 아픈 상처의 계절”이었고, “운동권에서조차도 얼마나 남민전 사건을 편견적이고 선입견에 차서 냉정하게 대했던가”를 참담하게 회고했다. 사건이 터졌을 때, 나는 대학교 2학년이었다. 여기저기서 남민전이 얼마나 무모하고 분별없고 소영웅주의적이고 모험적이고 맹동적이고 운동에 해만 끼쳤는가를 성토해댔다. 그 와중에 누군가가 물었다. “가만, 그래도 연장이라도 한 번 들어본 게 지리산에서 다 깨진 다음에 처음이잖아!” 반년쯤 지나 광주에서는 수천의 시민군이 총을 들었다.
남민전의 주모자는 당시 45살(1934년생)의 이재문이었다. 퇴계를 배출한 진성 이씨 유학자 가문 출신인 이재문은 4월혁명 직후 짥은 기간 발간된 <민족일보>의 기자를 지냈고,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군사정권의 혹심한 탄압과 연이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진보세력은 끊임없이 혁명의 지도부인 전위조직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혁명의 지도부 없이는 민족민주혁명의 승리를 기대할 수 없다며 즉각적인 전위조직 건설을 주장한 반면, 이재문은 즉각적인 당 건설 주장에 대해 “누굴 믿고 당을 만들자는 것인가. 과거 운동에서 실패한 사람들과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인자의 양성이 필요하다”고 반박했다고 한다. 특히 1974년 봄 전국적인 학생시위가 준비될 당시 대구·경북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진보인사들 사이에는 투쟁 방향을 놓고 상당한 의견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전위조직을 시급히 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중앙정보부는 ‘인혁당 재건위’를 조작했다. 8명의 목숨을 앗아갔지만 ‘인혁당 재건위’라는 명칭의 단체는 조직된 바 없었다. 1차 인혁당 사건을 겪은 진보인사들은 명칭, 강령, 규약 등을 갖춘 조직을 만들 경우 당장 ‘넥타이공장’(교수대)에 끌려갈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형식이 없는 아주 느슨한 모임만 가질 뿐이었다. 이재문도 체포되었다면 사형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지만 그는 일찍이 모든 연락을 끊고 지하로 잠적했다. 전창일의 집에 피신중이던 이재문이 전창일과 함께 저녁을 하고 있을 때 경찰이 전창일을 잡으러 들이닥치자 전창일은 이재문이 잡히면 사형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시간을 끌어 이재문이 벽장 속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고 한다. 별일 없을 것이라 생각해서 이재문이 은신처로 택했던 친구 전창일은 이렇게 잡혀가 무기징역을 받았다.
경찰은 이재문을 잡기 위해 특별검거반을 편성했다. 이재문의 가까운 선배인 김병권은 해방전략당 사건으로 5년형을 받고 복역 후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매일 특별검거반에 불려가 이재문을 잡으러 다녀야 했다. 김병권은 낮에는 이재문을 잡으러 다니는 척하고 밤에는 몰래 이재문을 만나 수사 방향도 이야기해주고 깊이 있는 정세토론도 같이 했다. 이렇게 몸을 피하기 1년여, 40살을 갓 넘긴 이재문의 머리는 하얗게 세어버렸다. 1975년 4월8일 대법원은 인혁당 관련자 8명에 대한 상고를 기각하여 사형을 확정했고, 박정희 정권은 형 확정 18시간 만인 4월9일 새벽 4시부터 연쇄 사법살인을 저질렀다. 큰 뜻을 품었으나 유신체제에 맞서 제대로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목숨을 빼앗긴 것이다. 사람이 한번 세상에 태어나서 불의 앞에 납작 엎드려 있어도 죽고 마주 싸워도 죽어야 할 운명이라면 마주 싸우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김남주는 미지근한 싸움은 차라리 참는 게 낫다고 했다.(<진혼가>) ‘얼어붙은 강을 으깨어’ 놓기 위해 전사 김남주가 원했던 것은 ‘철의 규율’과 ‘불의 열정’과 ‘바위의 조직’이었다.(<강>)
남민전 사건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이고 어쩌면 황당하기까지 했다. 남민전 전사들의 헌신성과 민주화운동 진영의 보통 사람들이 느꼈던 황당함 사이의 거리는 인혁당 사형수 8명의 억울한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느냐의 차이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1980년대의 맥락에서 본다면 한국전쟁 정전 이후 가장 과격한 운동집단이었다는 남민전의 강령이나 분위기는 특별한 것이 아니고, 그 강령은 민주화 이후 “재야의 여러 단체에서 공개적으로 내세우는 강령에 비추어 오히려 온건”한 것이라는 평까지 받고 있다. 그것은 광주의 힘이었다. 1980년 5월27일 새벽 ‘나는 도청에 남았을까’라는 질문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은 과감하게 모든 금기를 뛰어넘어 전두환을 향해 돌격했다. 1980년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깊이 간직한 사람들의 행동은 그런 슬픔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볼 때 무모하고 모험적이고 편협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광주가 있기 5년 전, 인혁당 8명이 목숨을 빼앗겼을 때, “그들은 나일 수 있고 내가 그들일 수 있었다. 그들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일 수 있었다”(홍세화)고 생각한 사람들은 불행히도 많지 않았다. 인혁당은 그렇게 쓸쓸하게 죽었고, 남민전 전사들은 그만큼 더 돌출적으로 과격했다. 이재문은 전창일의 부인을 통해 인혁당 사형수 8명의 가족으로부터 가신 이들이 입었던 속옷을 모아 남민전의 깃발을 만들었다. 홍세화는 이재문으로부터 그 깃발의 내력에 대해 들었을 때 “눈물이 핑 도는 현기증”을 느꼈다고 한다.
남파간첩도 고정간첩도 아닌 ‘코레콩’
인혁당 관련자들에 대한 연쇄살인이 있고 채 1년이 안 된 1976년 2월29일 청계천 3가의 태성장이라는 중국음식점에서 이재문, 김병권, 신향식 등 3인은 남민전의 결성식을 가졌다. 이재문은 1차 인혁당 관련자이고, 김병권은 해방전략당, 신향식은 통혁당 관련자였다. 꼭 그렇게 모으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1960년대를 대표하는 전위조직 관련자들 중에서 탄압 속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남민전이 결성된 바로 다음날인 3월1일, 명동성당에서는 전 대통령 윤보선, 전 대통령 후보 김대중, 원내 최다선 의원 정일형, 종교인 함석헌 등 저명인사 11인이 서명한 ‘3·1 민주구국선언문’이 3·1절 기념미사의 마지막 순서로 낭독되었다. 시위도 농성도 없이 달랑 선언문 한 장 성당에서 읽었을 뿐인데 김대중 등 11명이 구속되었다. 공개적인 영역, 합법적인 영역에서의 모든 활동은 철저히 차단된 것이다. 독재정권에 대한 싸움을 포기한다면 모를까, 투쟁을 한다면 비합법, 비공개, 지하활동밖에는 길이 없었다.
더구나 1975년 ‘사회안전법’이라는 악법이 공포되면서 과거 좌익활동에 관련되었던 사람들은 신고하고 전향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보안감호란 명목으로 다시 투옥되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재문은 이미 수배중이었고, 김병권과 신향식은 사회안전법 때문에 지하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꼭 이런 처지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남민전이라는 지하 비합법 전위조직에 가담한 사람들은 혁명가로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었다.(이재문은 후일 사형을 선고받고 1981년 11월 고문후유증으로 서대문구치소에서 옥사했다.) 목숨을 걸었다는 것만으로 모든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겠지만, 목숨을 걸어본 사람들의 행동을 가벼이 평가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니다. 조직의 모든 기밀을 담은 문서 보따리와 모든 증거물과 수배자들이 한꺼번에 털려버린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그 어두운 죽음의 시대를 치열하게 산 남민전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안도현의 짧은 시 한 구절을 한 번은 외워 보아야 한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유신정권은 남민전이 이북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가혹한 고문을 가하며 관련자들을 수사했지만 남민전이 이북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밝혀내지 못했다. <동아일보>는 남민전에 대해 “북괴의 무장남파간첩도 아니고 접선간첩도 아니며 고정간첩도 아닌 점에서 ‘코레콩’은 주목을 끈다”고 보도했다. 그럼에도 검찰은 논고문에서 “이 사건은 직접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김일성의 지시를 받지 못하였을 뿐”이지 북한공산집단의 “대남간첩단 사건임이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남민전 사건으로 사형을 당한 신향식의 공소장을 보면 남민전 중앙위원회는 “남민전은 북괴의 지시에 의한 남한의 혁명세력이 아니고 남한 출신 인사의 자주적 혁명단체”이고, “북괴와의 접촉이 가능하면 남민전과 북괴의 대표가 대등한 입장에서 접촉한다”는 데 합의하였다고 한다. 이 점은 북을 ‘남조선혁명’의 지도역량으로 상정했던 통혁당과는 다른 입장이었다.
남민전은 7년에 걸친 유신시대에서 그 절반이 넘는 3년8개월간 지하에서 활동했다. 고도의 정보정치가 행해졌던 유신시대에 상당한 규모를 가진 지하조직으로서는 꽤 긴 시간 활동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남민전의 보위력은 상당한 것이었다. 남민전이 조직된 직후 3인 중앙위원의 한 사람이었던 김병권이 남민전 강령 초안을 소지한 채 검거되었으나, 조직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1977년 초에는 민투의 책임자였던 이재오(한나라당의 그 이재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었으나 불똥이 지하조직으로 튀지 않았다. 1979년 4월에는 남민전의 무력부장 임동규(현재 24반무예협회 총재)가 조총련 간첩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받았으나(임동규는 남민전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또 받아 행형 사상 보기 드문 ‘쌍무기’가 되었다) 조직이 드러나지 않았다. 1979년 4월에는 남민전의 혜성대 전사들이 당시 7공자의 맏형으로 불리던 동아그룹 회장 최원석의 집을 털다가 이학영(현 민주당 의원)이 체포되고 ‘공범’인 박석률, 김남주, 차성환 등이 사진수배 되었지만 역시 남민전이라는 지하조직은 드러나지 않았다.
조직원의 포섭과 교양 이외에 남민전이 주로 민투의 이름으로 대외적으로 했던 주된 활동은 전후 8차례에 걸친 유인물의 배포였다. 지금과 같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는 유인물의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유신과 같이 끝없는 침묵을 강요당하던 시기에는 바늘 하나가 떨어져도 큰 울림이 오듯 유인물 한 장이 주는 충격이 적지 않았다. 남민전은 유인물의 배포에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실력을 과시했다. 건물 옥상의 애드벌룬에 대량의 유인물을 묶어 쑥으로 만든 담배에 불을 붙여 하늘로 띄우면,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 쑥담배가 타들어가 유인물이 묶인 끈을 태워서 하늘에서 유인물이 살포되는 방식은 남민전이 처음 개발한 것이었다. 버스가 정류장에 정차했을 때 유인물을 버스의 환기구를 통해 지붕에 두고 내리면 달리는 버스에서 유인물이 살포되도록 하던 방식은 80년대에도 애용되었다. 유인물 배포는 성공적이었지만, 조직의 총체적 붕괴의 실마리도 유인물 배포에서 비롯되었다. 장기간의 유인물 배포에 노이로제가 걸린 경찰은 남민전이 와이에이치 사건 김경숙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뿌린 유인물의 필체가 몇 년 전 서울대에 살포된 유인물의 필체와 동일한 것을 확인하고 그 필체의 소유자인 김부섭을 추적하여 김부섭의 상부인 이수일(전 전교조 위원장)의 집을 덮쳤다가 뜻밖에 이재문과 박석률, 김남주, 차성환 등 최원석 집 ‘강도 사건’ 수배자를 한꺼번에 잡아가게 된 것이다.
박처원·유정방에게 고문당한 이재오의 증언
경찰이 남민전이라는 거대한 지하조직을 적발한 것은 뜻하지 않게 유신정권의 심장부에서 권력투쟁을 격화시켰다. 중앙정보부는 방대한 조직망에도 불구하고 남민전의 존재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수집하지 못했다. 남민전과 같은 조직을 적발해내는 것이 중앙정보부의 임무였음에도 남민전이라는 대어를 낚은 것은 경찰이었다. 경호실장 차지철은 남민전 사건이 터지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무능을 질타했고, 박정희도 김재규에 대한 신임을 거두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남민전 사건은 김재규가 박정희의 신임을 잃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남민전 관련자들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이재오는 자신이 박종철 고문치사 및 은폐 사건의 주역인 박처원과 유정방에게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김근태를 고문했던 자의 사진을 보고 그의 이름이 이근안임을 확인한 것도 이재오였다. 남민전 사건 이후 1980년대에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한 자들은 이근안이 당당하게 이재문이가 왜 죽었는지 아느냐고 하는 소리를 들으며 끔찍한 일을 당해야 했다. 남민전에서 청년학생에 대한 조직과 지도를 담당했던 최석진(법륜 스님의 가형)은 고문을 견디다 못해 직원 화장실 창문으로 투신하여 중상을 입고 들것에 누운 채 재판을 받아야 했다.
남민전이 적발되었을 때 대부분의 자료는 그 성원들이 무명의 사회인이라고 했다. 그때는 그랬을지 모른다. 당시 <동아일보>는 “그 구성원들도 남의 달콤한 꾐에 속아 넘어가는 단순한 사람들이 아닌 교사, 학생, 지식인 등 이른바 ‘아는 사람’들이며 사회지도층도 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썼다. 30년이 넘게 지난 오늘의 입장에서 보면 남민전에는 오른쪽으로는 이재오에서 왼쪽으로는 김남주에 이르기까지 인재가 참 많았다. 그 수많은 인재들이 목숨을 걸고 재벌집 담을 넘고 예비군 훈련장에서 총기를 분해해서 훔쳐 나왔다. 유신은 그런 시대였다. 그 어둠의 시대는 남민전의 적발과 함께 저물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