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연꽃
남대문과 서울역 일대가
온통 연꽃으로 만발한 연못이었다는
서을 시청 앞 프라자호텔 자리에
지천사라는 절이 있었고
그 절의 연못 자리가
바로 지금의 서울역 자리라는
그런 사실을 안 순간부터
서울역은 거대한 연꽃 한 송이로 피어나더라
기차가 입에 연꽃을 물고 남쪽으로 달리고
지하철이 연꽃을 태우고 수서역까지 달리고
진흙 속에 잠긴 인수봉도 드디어
연꽃으로 피어나
서울에 연꽃 향기 진동하더라
이종은, 그대에게 말하다
그대에게 가는 표지판 하나
제대로 보지 못하고
흐린 날, 나는 그대의 이름을
대신 쓴다
'그대에게 가는 길'이라고
마르지 않은 붓을 털고 일어나
또 헤맨다
언제나 그대에게 가는 길은
변해가는 숲이었고
나는 헤매는 방랑자였다
표식을 해둔 나무는
헤매는 만큼 또 자라있고
나는 그 숲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젠 어느 메아리를 불러다가
그대 사는 곳에 띄워보낼까
나의 메아리는 언제나
부재중이었다
임기정, 사랑
노부부가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가
파란불이 들어오자 징검다리 건너듯
지팡이로 두드리며 할아버지가 먼저 건넜고
할머니는 빠졌다 올라왔다 하면서 건너다 그만
중앙선에 붙들리고 말았다
달리는 자동차 앞뒤로 치고 가는 바람에
휘청거리는 할머니
중심을 잡으려고 두 손으로 지팡이 꽉 붙들고
왔던 길 되돌아가 할머니에게
한 말씀 던지는데
그 말이 신호등이 끊어지듯 한다
김성춘, 달을 듣다
개구리 우는 무논에 달이 피었다
사과꽃 진 허공에도 달이 피었다
달을 만나면
달에서 물소리가 난다
허공에
저 물소리
물소리 따라 꽃잎이 왔다 꽃잎이 진다
어차피 밤은 깊었고 밤은 또 밤을 부른다
달이 무논을 첨벙첨벙 지나간다
삶도 물소리처럼 지나간다
달이 피었다
물소리가 난다
유성순, 그대, 흙 속에 뿌린 씨앗
스물 갓 넘은 흙 속을 파헤쳐
비지땀 흘리며 심었던 씨앗을 보라
한 그루 나무를 키우기 위하여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하여
비바람에 굴하지 않고 견뎌 온 세월을
흙이 있기에 그대의 씨앗은
그대보다 훨씬 웃자라
이제는 눈높이 안 맞는 것을
새들과 어울려 눈높이 맞추려는 것을
그대 한 톨의 씨앗이라 해도
내 속에 들어 와
물결치는 파도를 타고 꿈틀거릴 때
난 이미 씨앗과 약속을 했었지
한 그루
나무를 위하여
한 송이
꽃을 위하여 흙이 되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