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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1층. 보안부 사무실과 그와 관련된 시설들, 창고 몇 개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다른 층에 비해 좁은 편이다. 보안요원의 업무는 이곳에서 시작해서 연구소 전체를 몇 바퀴씩 돌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끝난다. 하루 3교대이기에 일부는 낮에 잠을 자고 밤에 일어나 연구소를 배회한다. 이곳에서 밤과 낮의 개념은 연구원들이 언제 일어나있고 언제 잠들어있는지를 뜻할 뿐이다. 보안요원의 밤과 낮은 업무시간표와 휴게실이 정한다.
연구소 건물에 있는 휴게실은 둘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나는 부엌과 안락의자, 텔레비전 따위가 구비된 대기실이다. 이곳은 언제나 조명이 밝게 켜져 있고 보안부 요원들이 떠들고 욕하고 웃는 소리 때문에 시끌시끌하다. 다른 하나는 수면실이다. 말 그대로 침대가 늘어서 있고 조명이 항상 어두컴컴하게 되어 있다. 방금 업무를 마치고 복귀한 요원들이 쓰러져 자는 곳이기에 코고는 소리가 꽤나 시끄럽고 발 냄새 같은 퀴퀴한 냄새도 지독하다. 수면실로 기어들어가면 밤이다. 대기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잡담한다면 그 때는 낮이다. 사무실에서 앉아 있으면 근무시간이고.
숙소는 지상에 있었다. 4인 1실. 듣기로는 닭장 같다고 한다. 스미스는 아직 신입이었기에 숙소를 배정받지 못했다. 한참 정리중이니까 내일이나 모레 정도에 들어가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때까지는 수면실에서 잠을 청하고 화장실에서 몸을 닦아야 한다.
신입은 다른 경력사원들과 달리 순찰을 도는 시간대가 딱 정해져 있지 않았다. 대게 자리가 비는 순찰조의 자리에 끼어서 갔다. 대체로 미국인과 한 조가 되었지만, 어떤 때는 러시아인과 한 조가 되기도 했다. 그나마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러시아인은 없었다. 근무시간에 그들은 함께 복도를 걸어 다니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의 주제는 대체로 여자연구원과 음식, 그리고 연구소에 대한 뜬소문으로 갈렸다.
한 번은 ‘올라셴코’라는 러시아 보안요원이 지하 6층에 대해 이야기 했다.
“지하 6층에 대해서 아나?”
스미스는 창고로 쓰인다는 점만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건 거짓말이다. 틀림없어. 창고는 복도나 연구실에도 많아.”
올라셴코는 연구소 기밀을 누설하는 스파이처럼 속삭였다.
“지하 6층은 이 연구소에서 진짜로 연구하는 것이 있다. 1, 2, 3, 4, 5층…… 그건 전부다 가짜야. 399번 문제가 왜 있겠어? 왜 그런 특수한 코드까지 만들어 놓겠냐고?”
그가 근무시간 전에 보드카 3잔을 마셨다는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스미스는 399번 문제에 대해 찾아봤으나 그가 가지고 있던 보안요원 수첩에는 그런 코드가 없었다. 그는 올라셴코가 술김에 장난을 걸었다고 생각하고 넘기려 했지만 마음 한 켠으로는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언젠가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B6라고 쓰인 단추를 눌러본 적도 있었다. 버튼이 고장 났는지, 아니면 일부러 그런 것인지, 작동하지 않았다.
오스틴과 한 조가 된 것은 지난 아침교대 때였다. 스미스는 이 참에 뭔가 보안요원이 순찰 말고 또 무슨 일을 하냐고 물어봤다. 방문객들을 검문하거나 외부에서 들어오는 화물을 검사하는 것 같이 잡무에 불과했다. 그 요란한 사격연습이 다 뭐였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지하 6층에 대해 물어봤으나 창고로 쓰인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사실 나도 여기 온지 한 달밖에 안됐어.”
올라셴코가 뭐라고 말했는지 알려주자 그는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일주일 동안 이곳에서 지냈다. 점차 익숙해져 간다.
이곳에서 평생 살고 싶은 것은 아니다.
여기는 단지 외떨어진 피난처일 뿐이다.
지금은 다음 단계로 건너 뛰기 위해 몸을 굽히는 순간.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그렇기에 조금 더 기다리는 것일 뿐.”
어느 날 저녁, 스미스는 그의 사물함 안에 이런 글을 적어놓은 쪽지를 붙여놨다. 아직까지는 다음 단계가 어디인지, 무슨 일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2026년 6월 7일. 연구소에 입사한 지 3주 가까이 되어가는 날이다. 스미스는 어제 저녁에 있었던 외박인원 조사에 응답하지 않았다. 다른 곳에 갈 이유도 없고 갈만한 장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보안요원 10명을 포함한 외박 신청자 60여 명은 오늘 아침에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 보안요원의 수가 4분의 3으로 줄어들었지만 다행히도 업무는 늘어나지 않았다.
점심식사 직후, 보안 책임자인 웨인 크리스 부장이 휴게실로 들어오더니 스미스를 찾았다.
그는 의논할 사항이 있으니 따라오라고 말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는 ‘임무전문가’라는 개념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연구소에서 처할 수 있는 특수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인데, 그런 특수한 상황에 대해서 대비하고 연습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오스틴은 응급처치 전문가이다. 빅토르 레미조프라는 사람은 기밀보안유지 전문가이다. 어떤 임무전문가로 선정되면 몇 주 동안 후반기 교육을 받아야 했다. 지금까지 있었던 훈련은 기초에 불과했다는 소리다.
"네가 해야 할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웨인이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말했다.
"조금 모호한 것 같습니다. 제가 무슨 일을 할지 확실히 알려주십쇼.”
"연락책. 미국과 러시아를 오가며 정보, 자료, 특정한 물품들을 전달하는 일이다. 괜찮은 직책이야. 많은 경험이 필요하겠지만. 러시아어는 얼마나 할 줄 알지?"
"그건 전에도 물어보신 거 같습니다. 혹시 꼭 필요한 건가요?"
"아직도 러시아어를 모른다고는 하지 마라."
웨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계속 걸었다. 스미스는 그를 따라가면서 말했다.
"몇 마디는 할 줄 압니다. 대화까지는 아직 어렵습니다만.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네 선임에게."
그는 스미스를 슬쩍 돌아보면서 덧붙였다.
"후반기 교육이 끝나도 최소 6개월정도는 배우고 익히면서 시간을 보내게 될 거다. 그리고 일 년 정도는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게 될 것이고. 그 다음부터는 능력에 달렸지."
스미스는 대꾸 없이 그를 따라 걸었다. 애초에 몇 년 동안 이런 곳에서 썩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기껏해야 3개월 뒤면 이곳에서 나갈 생각이었다. 만약 경찰이 그를 용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미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웨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너는 무슨 일을 저지르고 여기로 왔지?”
갑자기 저런 질문이 튀어나오니 당황스러웠다. 웨인은 그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더니, 계속 말했다.
"난 보안요원이다. 내가 맡은 곳은 므리옐 연구소이고, 내 임무는 모든 위험요소를 차단하는 것이지. 그래서 새로 들어온 신입이 어떤 사람인지 간단한 뒷조사 정도는 한다."
웨인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계속 걸었다. 그저 하는 말이겠거니 하면서 대꾸를 안 했더니 그가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봤다. 눈매가 매섭다. 분명 의심하는 눈초리다.
“좋은 대학교에 들어갔지, 학점도 좋아, 연구 활동도 훌륭해. 너는 이런 곳에 취직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 네가 뭔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말이다.”
하나같이 핵심을 꿰뚫는 말이었다. 여기서 진실을 말해야 할까? 보안 수준이 철저한 연구소의 보안 책임자는 살인사건 용의자가 연구소에 취직하는 것을 용인할까?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어떻게 진압해야겠는데, 뭐라고 말해야 하지?
침착하자.
‘간단한 뒷조사’ 정도라면 알 수 있는 것은 여기에 올 필요가 없는 사람, 이라는 정보에 불과하다. 질문의 핵심은 왜 다른 좋은 직장에 다니지 않고 여기로 왔는가, 이것이다. 답은 간단하다.
“자기가 살던 곳에서 떠나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잠시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요.”
어설픈 회피성 대답이었다. 스미스는 뭔가 다르게 대답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았으나, 거짓말 말고는 더 좋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이게 옳은 답변이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고향에서 잠시 떠나고 싶었습니다. 어딘가 격리된 지역에서 잠시 쉬고 싶었을 뿐입니다. 조금 힘든 일이 있었거든요.”
보안부장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제대로 먹혔기를 기대할 수밖에.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마 무슨 일인지 가늠해보고 있겠지. 그리고 필요하다면 ‘간단한 뒷조사’를 좀 더 해보겠다고 판단할지도 모른다.
그가 말한다.
“한 가지만 확실하게 하지. 이 연구소 안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안 된다. 무슨 처벌을 받을지는 말하지 않겠어. 직접 규정집을 찾아봐라. 그리고 명심해. 네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내가 너를 지켜보고 있다. 이걸 생각해라.”
웨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계속 걸어갔다. 일단 추궁은 끝났으나 의심은 계속될 것이다. 어쩌면 이 연구소도 그렇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은 아닐지 모르겠다.
계단으로 한 층 내려가고 다시금 어두컴컴하고 긴 복도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웨인이 갑자기 제자리에 서서 뒤따라오던 스미스와 거의 부딪칠 뻔했다.
"방금 진동을 느꼈나?"
느끼긴 했었다. 다만 그 말을 듣기 전까지 자신이 발을 헛디뎠다고 생각했었을 뿐이다. 그는 혹시 발 밑이 아직도 흔들리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건 아니다.
"지진인가요?"
갑자기 형광등이 지지직 거리더니 퍽 소리와 함께 나가버렸다. 광원이 사라진 복도는 정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손을 휘저어봤으나 공기를 헤치며 바람을 일으키는 느낌 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소리쳤다.
"부장님, 거기 있어요?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움직이지 마, 전력이 나간 거다. 아무래도 연구소에..."
다시 진동이 일었다. 소름 끼치는 금속 마찰음이 몇 번 들렸다. 시야가 차단된 상태에서 진동과 소음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뚜렷하게 들렸다. 환풍구를 통해 비명소리와 누군가의 고함이 들려왔다.
“부장님?” 스미스가 소리쳤다. 대답이 들리지 않았기에 다시 외쳤다.
“어디 있습니까?”
“조용히, 난 근처에 있다. 계집애처럼 징징거리지 말고 손전등이나 꺼내.”
그때서야 주머니에 손전등이 있음을 깨달았다. 조명밝기를 최대로 올리고 앞쪽을 향했다. 을씨년스러운 푸른빛이 주변을 비추기 시작하면서 깨진 형광등 조각이 반짝이는 모습이 보였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전등 몇 개 깨진 것 말고 별다른 문제는 없는 모양이다. 웨인은 저만치에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손전등을 꺼내더니 이쪽으로 비췄다.
"전력은 금방 복구된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명등의 빛이 되살아났다. 무릎 아래도 제대로 보이지 않던 상태에서 빛에 바로 노출되니 태양을 직접 본 것처럼 눈가가 얼얼했다. 웨인이 그의 손을 잡아 끌었다.
"빨리 움직여. 무슨 일인지 알아 봐야 한다."
전력공급이 별로 안정적이지 않은지 조명등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짧은 정전이 일어났고, 조명이 돌아오자 웨인은 손전등을 꺼내서 방탄복 어깨 끈에 매달았다.
한참을 걸어가다 복도의 끝이 보일 때쯤 그는 작게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스미스는 어리둥절한 상태로 그를 따라갔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웨인은 복도 옆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잡아탄 다음, 지하로 내려가게 했다. 또 정전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려는지 모르겠다.
진동이 울렸다. 웨인은 그의 PDA를 꺼내서 메시지를 확인하고 스미스에게 보여줬다.
"399번 사태?"
어느새 웨인의 손에는 묵직한 쇳덩이가 들려 있었다. 권총이다. 그는 슬라이드를 당겨 안을 살펴본 다음, 분명 실탄이 꽉 차있을 탄창을 한 손에 들고 무게를 가늠했다. 이윽고 그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100번대, 내부 세력에 의한 보안위험. 200번대, 외부 세력에 의한 보안위험. 300번대, 실험 도중의 보안문제. 399번..."
그는 탄창을 삽입하고 슬라이드를 한번 당겼다, 놓았다. 척, 하는 쇳덩이가 맞물리며 단단히 봉해지는 소리.
"지하 6층 연구실. 치명적인 격리실패."
지하 5층.
문이 열리자마자 연구원 한 무리와 마주쳤다. 웨인은 그들에게 지상으로 올라가라고 말한 다음 보안요원이 있으면 아무나 17번 연구실로 보내라고 말했다.
“17번 연구실이요?”
연구원이 되묻자 그는 뭐가 됐든 그렇게 말하라고 요구했다.
“지하 6층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 있나?”
웨인이 말했다. 그는 PDA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한 번 있습니다. 올라셴코가 연구소에서 가장 중요한 게 지하 6층에 있다고 했죠.”
“맞아. 이 연구소에는 지상 1층부터 지하 5층까지 16개의 연구실이 있다. 그리고 지하 6층에는 17번 연구실이 있지. 이 계단으로 간다.”
언뜻 보기에 몇 년이나 쓰이지 않은 것 같은 문이었다. 페인트가 벗겨져 있고 문틀과 경첩부근에 녹이 슬어 있었다. 문패에는 비상계단을 의미하는 픽토그램이 있었다. 웨인이 문을 열었다. 겉보기와는 달리 끼익하는 쇳소리도 들리지 않고 부드럽게 열렸다. 계단 내부도 예상과는 다르게 깔끔했다.
“6층으로 가는 통로는 이것밖에 없습니까?” 스미스가 물었다.
“몇 개 더 있다.” 웨인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일단 현장에 도착하면 격리실패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살핀다. 동시에 아직 연구실에 남아있는 연구원들을 출구로 인도해야 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자세한 사항은 모르지. 직접 봐야 알 것 같아.”
계단을 나오자마자 앞으로 쭉 뻗은 복도가 보였다. 좌우로 일정 간격 창문이 나 있었다.
“왼쪽은 연구실이다. 오른쪽에는 샘플이 있다. 아니… 그 반대, 왼쪽에 보이는 게 샘플이야. 2007년에 회수한 물건이지.”
샘플은 두 개였다. 하나는 거대한 돌. 표면이 빛을 받아 번쩍번쩍하는 것이 평범한 돌은 아닌 것 같았다. 스미스는 저게 금속 재질일 것이라 추측했다.
“저건 운석이다. 퉁구스카에 떨어진 운석이지. 운석의 충돌로 호수가 생겼을 정도로 큰 놈이었어. 그리고 저 장치는, 호수 밑바닥 약 25미터에서 발견한 것이고.”
장치는 완벽한 정입방체였다. 크기는 대략 한 변이 1, 내지는1.5미터 가량이었다. 표면은 흑요석 같이 광택있는 검은색이었으나 푸른색 빛이 나는 부분이 실금처럼 있었다. 입방체 한 쪽으로는 수많은 전선이 실타래처럼 늘어져 있었고, 누가 조종하고 있는지 무인로봇이 옆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천장에는 거대한 천체망원경 같은 기계가 입방체를 조준한 채 달려있었다.
“몇몇 주요연구원들이 저 물건을 연구해오고 있었다. 벌써 몇 년째 그 일을 하고 있지. 그들이 뭘 알아냈는지, 무슨 연구를 하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여기서 보기에는 별 이상이…”
스미스가 말하다 멈췄다. 입방체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게다가 점점 뜨거워졌다. 그들이 보고 있는 와중에 전선 몇 줄이 갑자기 툭툭 떨어져나갔다. 곧이어 입방체 표면에 연결된 모든 전선 피복이 녹아서 늘어지다니,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창문을 피해 몸을 숙였다. 장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견딜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죠?”
웨인은 일단 연구 책임자를 찾자고 대답했다.
그들이 연구실 쪽으로 서둘러 움직일 때 복도 반대편에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웨인이 권총집 잠금을 헐겁게 했다. 스미스도 그를 따라 권총 손잡이를 쥐었다. 여차하면 쏠 수 있도록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려놓은 상태였다.
복도 모퉁이에서 튀어나온 것은 사복을 입고 있는 중년 남자였다. 셔츠 가슴주머니에 신분증을 끼워 넣었고, 보안 등급은 가장 높은 초록색이었다. 도움을 요청한 연구원이 틀림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웨인이 소리쳤다. 연구원은 그 자리에 멈춰서더니 따라오라고 손짓하면서 말했다.
“비상이야, 빨리들 따라와!”
영문도 모르고 연구원을 쫓아 뛰어가던 스미스는 왼쪽 모퉁이로 돌았을 때 우연히 창문너머 샘플을 쳐다보게 되었다. 시커멓게 치솟는 연기와 이리저리 튀는 불꽃 사이에서 간신히 보였는데, 입방체 샘플 한 면의 상태가 좀 이상했다. 원래 저런 것일까? 표면이 입방체 중심을 향해 깔때기처럼 움푹 들어가 있었고, 한 가운데에는 시커먼 구멍 같은 것이 보였다. 그는 웨인에게 그 사실을 알렸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연구실은 복도와 샘플이 놓인 방 사이에 있었다. 과학자 네 명, 이제 다섯 명이 모니터를 심각한 표정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모니터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치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래프도 있었는데, 그들이 보는 와중에도 완만하게 오르고 있었다.
“최소 수치는 몇이지?”
그들을 인도한 과학자가 뛰어들어오며 말했다. 대머리 과학자가 대답했다.
“450. 벌써 두 배를 넘어섰어. 이제 되돌릴 수 없을 걸세.”
“2차 시험 때 투입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방출하고 있다.”
웨인은 과학자들에게 상황설명을 부탁했다. 대머리 과학자가 이쪽을 흘깃 쳐다보더니 대답했다.
“설명할 시간은 없어. 지하 3층 이하의 모든 연구원을 지상으로 대피시켜. 곧 붕괴가 시작될 거야.”
“붕괴라뇨?”
스미스가 물었지만 그들은 자기네끼리 뭔가 토론하고 있었다.
“대피 명령을 끝냈습니다. 이제 상황설명을 시작하시죠. 뭔지 알아야 조치를 취할 것 아닙니까?”
웨인이 말하고 나서야 과학자 한 명이 이쪽을 쳐다봤다. 그는 귀찮은 듯이 대강대강 설명했다.
“샘플이 알파좌표계의 특정필드와 공명하고 있네. 저 입방체 한 가운데에 필드 공간 유동성이 증가하는 특이점이 관측되었지. 지금까지는 필드 사이의 반발력이 버티고 있지만 얼마 못 가 퍼텐셜 압력이 필드 반발력을 뛰어넘게 된다.”
스미스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연구소가 붕괴된다는 뜻일까? 그는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아직은 가설단계네. 몇몇 모델은 필드 사이에 부분적인 융합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하고, 일부는… 완전융합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어. 그러면 끝장이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스미스는 결국 그렇게 말했다. 이래서야 설명을 안 한 것보다 못하다. 뜻 모를 고유명사 때문에 괜히 머리만 복잡해지고 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그렇게 크지 않아. 하지만……”
과학자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다음 순간, 입방체가 폭발하듯 부풀어 올랐기 때문이다. 아니, 입방체가 폭발한 것이 아니라 입방체를 중심으로 시커먼 구체가 터져 나왔다. 구체는 입방체 전부와 화재현장, 그리고 폭탄해체로봇까지 삼켜버렸다. 심지어 그 일부가 관측창을 뚫고 이쪽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이상한 장면이었다. 스미스는 그 구체에게서 본능적인 이질감을 느꼈다. 구체에게서 어떤 입체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검은색 페인트를 부어 놓은 것 같았다. 모든 부분이 균일한 검은색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상한 말이지만, 지금까지 스미스가 본 어떤 검은색보다 더 검은 색이었다. 광택 하나도 없고. 얼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어느 것에도 매달려 있지 않은 채 중력을 무시하고 공중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학자들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흥분해서 알 수 없는 단어를 외치기 시작했다.
“모델 22가 맞았군!”
대머리 과학자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옷소매로 닦아냈다.
“루이스가 맞췄어.”
“박사님.”
웨인이 그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금 천천히, 그리고 충분히 크게 말했다.
“박사님, 저 구체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우리도 몰라. 이 상황은 통제되고 있지 않다네. 우린 저 구체의 정체가 뭔지도 아직 몰라. 젠장, 검사 장비 대부분이 구체 안에 들어가 있네. 그것들이 제대로 작동했으면 좋겠는데!”
“EOD 무선연결을 확인해봐!”
5명 중 유일하게 안경을 쓰지 않은 과학자가 말했다. 구체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는 잠시 후 이렇게 말했다.
“저기! 구체 안에서 뭔가 나온다!”
목구멍에서 피 맛이 느껴진다. 그는 쿨럭거리며 기침을 연달아 하다가 거품이 잔뜩 섞인 가래를 복도 타일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건물 안에서 침 뱉으면 안 된다는 에티켓을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빨리 올라가!”
웨인이 밑에서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뭔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놈들이다. 한 2층 가량 아래에 있는 것 같았다. 스미스는 눈 앞에 놓인 거대한 장애물을 올려다봤다. 보통 때는 성큼성큼 걸어 올라갔을 계단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 칸 한 칸이 힘겨웠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구멍이 갈라지는 것 같았고, 콧속 점막이 말라붙었는지 뻑뻑했다. 게다가 아무리 숨을 들이켜도 부족했다. 공기 중에 산소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연구원 인력 대부분은 지상에 올라가 있을 거다.”
웨인이 말했다. 그는 포머스 박사를 부축하면서도 스미스를 바짝 따라잡고 있었다. 호흡이 거칠기는 해도 그렇게 힘들어 보이지는 않는다.
“보안요원들에게 말해서 나머지 인원들도 지상으로 올라가라 할 거다. 그 다음에 지원병력을 받아서 지하 6층으로 다시 내려가겠다.”
그는 난간까지 잡고 올라가는 박사와 숨을 몰아 쉬는 스미스를 보고 한 마디 했다.
“여기서 포기할 생각이야? 놈들에게 죽을지도 몰라.”
“알고 있어!” 스미스가 대꾸했다. 포머스 박사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지금은 말 한 마디 하는 것도 벅찼다. 긴장상태에서 몇 십 미터를 전력질주하고 지하 6층에서 4개 층계를, 그것도 보통 건물보다 더 높은 층계를 뛰어오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아까 본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구체에서 튀어나온 것은 연구실 바닥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것이, 아니, 그 생물체가 일어나려고 버둥거리는 사이 기다란 꼬리가 구체에서 마저 빠져 나왔다.
그 생물체는 새까맣고 번들거리는 피부와 흰자위 없이 시커먼 눈알을 가지고 있었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중생대 육식공룡 같았다. 호두같이 주름진 머리, 기다란 목, 몸뚱어리 양 옆으로 튀어나온 어깨와 거기 달린 근육질 팔뚝. 팔다리와 몸뚱이는 딱딱한 껍데기 같은 것으로 둘러싸여 있기에 어찌 보면 곤충 같기도 했다. 특히 개미나 사슴벌레, 장수풍뎅이 같이 시커먼 곤충. 이쪽 말고도 실험실 내부에는 벌써 2마리가 먼저 빠져 나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놈이 이쪽을 쳐다봤다. 스미스는 놈의 눈동자가 순간 빛나는 것을 보았다. 마치 표범이나 호랑이처럼. 짧은 시간 동안 저게 평화로운 품성을 지니고 다른 종족을 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헛된 희망을 품었다.
놈은 입을 벌렸다. 이빨의 배열이 사람과 똑같았다. 놈이 안에서부터 짜내는 듯 찢어지는 소리로 울부짖었다. 과학자들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입을 딱 벌린 채 굳어 있었고, 그건 스미스도 부분적으로 마찬가지였다. 권총을 꺼내 들고 있었으나 방아쇠가,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놈이 이쪽으로 다가온다. 스미스는 놈이 고함이나 비명만 지르는 것이 아니라고 눈치챘다. 그것은 말하고 있었다. 마치 광신도의 중얼거림처럼, 간간히 탄성 같은 외침이 섞인 말소리였다.
“스미스!”
웨인이 몇 계단 아래에서 소리쳤다.
“소리가 더 가까워졌어. 아마도 한 층 아래에 놈들이 있는 것 같다.”
그는 속도를 더 올리려 했지만 마음뿐이었다. 무릎관절이 뻐근했고 종아리가 땅긴다.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이기가 괴로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이제 한 층만 더 올라가면 된다. 그러면 수많은 보안요원들이 도와줄 것이다.
망할, 아까 본 장면이 계속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놈이 너무 가까이 다가왔다.
누가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웨인이 놈의 머리통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놈은 짧게 발작하더니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하지만 그 사이 한 놈이 더 구체를 통해 난입했다. 그 놈은 구체에서 비치적 거리며 빠져 나오자마자 엉거주춤하게 두 다리로 섰으며, 그 키는 거의 2미터에 달했다. 이번에는 웨인이 뭘 할 사이도 없었다. 놈은 앞발로 가장 가까이 있던 대머리 과학자의 어깻죽지를 낚아채 붙들었다. 그리고 아가리를 벌려 비명 지르는 그의 머리를 물었고, 그리고, 씹었다. 두개골이 수박 부숴지듯 박살 났다. 끔찍한 소리와 함께 대머리 과학자의 머리통이 으깨져 버렸다.
관자놀이 가죽이 불룩 튀어나오더니, 그게 터져나가면서 시뻘건 살덩이와 핏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박사가 마지막 순간에 놈의 입에서 빠져 나오려 헛된 손질을 했던 것도 기억난다. 프레스 절단기 같은 이빨이 뒤통수를 눌러 으깨는 순간 마치 간질 환자처럼 발작하던 모습도, 그가 축 늘어지는 동시에 괴물이 머리를 흔들어 머리를 완전히 잘라내는 모습이, 두개골이 으스러지고 가죽이 찢어지며 나는 그 소리. 절단면에서 찢겨지고 남은 내장이 후두둑 떨어졌다.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난다.
계단을 모두 올라왔다. 스미스와 포머스 박사가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는 동안 웨인은 계단 출입문을 닫고 잠가버렸다. 겨우 엄지손가락 굵기의 잠금장치가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안심이 된다. 그들은 잠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나머지 보안요원들을 무기고로 호출했다.”
웨인이 말했다.
“대부분은 지상에 있더군. 일부는 우리보다 더 아래에 있고.”
스미스는 마지막으로 길게 숨을 내뱉고는 일어났다.
“우리는 올라갑니까?”
웨인이 짧게 대답했다.
“아니. 우린 다시 내려간다.”
“여기서 빠져나가자.”
웨인이 말했다.
스미스는 자신이 덜덜 떨고 있음을 깨달았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권총 총구가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그제서야 안전장치를 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박사들과 그 위에 포개어져 엎어져 있는 괴물을 멍하게 쳐다봤다. 괴물은 총알을 맞아가면서도 박사들을 죽여냈다.
웨인이 권총 탄창을 확인하며 재촉했다.
“스미스,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한다. 몇 놈이 유리창을 깨고 복도로 빠져 나갔어. 연구실 안에 다른 놈들이 있단 말이다.”
방아쇠 끝에 손가락이 올려져 있었으나 끝까지 총알 한 발 쏘지도 못했다. 처음 놈들이 튀어나왔을 때 제대로 대처를 했다면 박사들도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최소한 지금처럼 단 한 명만 살아남지는 않겠지.
“포머스 박사님.”
웨인이 말했다.
박사는 멍하게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다른 연구원들과 달리 입방체가 보이는 창문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여기서 나갑시다.”
스미스가 마침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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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네요. 워드에서 띄어쓰기를 제대로 해도 게시판에 복사/붙여넣기를 하면 가끔 띄어쓰기가 지워집니다. 일일히 찾아고치기가 곤란합니다. 그냥 이대로 두겠습니다.
단위계는 그냥 SI단위계를 사용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