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unrevealedme.tumblr.com/
BGM 출처 : https://youtu.be/4BnCTZc5--M
정한용, 겨울나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가만 들여다보면
거기에도 중심 줄기의 무게가 있다
땅에서 나무를 지나 저 하늘까지의 거리
처음 바람이 비롯된 곳부터
불어가야 할 목적지까지의 곤고함
그 가운데서 그 깊이를 측량하며
나무는 서 있다
뿌리가 빨아들인 지난 여름의 빗방울과
대륙 쪽에서 물어온
공기의 입자들이 거기에서 만난다
만나 서로의 선물을 건네고
협상하고 새 힘을 세우며
내일 올 봄을 위하여 거대한 잎을 준비한다
중심은 깊고 무거워
겨울 찬 흙에 꽂은 발톱으로 세상이 고요하다
안도현, 신년시
닭이 울어 해는 뜬다
당신의 어깨 너머 해가 뜬다
우리 맨 처음 입맞출 때의
그 가슴 두근거림으로
그 떨림으로
당신의 어깨
너머 첫닭이 운다
해가 떠서 닭이 우는 것이 아니다
닭이 울어서 해는 뜨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처음 눈 뜬 두려움 때문에
우리가 울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울었기 때문에
세계가 눈을 뜬 것이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하고 나하고는
이 아침에 맨 먼저 일어나
더도 덜도 말고 냉수 한 사발 마시자
저 먼 동해 수평선이 아니라
일출봉이 아니라
냉수 사발 속에 뜨는 해를 보자
첫닭이 우는 소리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세상의 끝으로
울음소리 한번 내질러보자
정호승, 잔치국수
중년의 여자가 포장마차에서
잔치 국수를 먹고 있다
누가 신다 버린 낡은 운동화를 신고
주저앉을 듯 선 채로
때 묻은 보따리는 바닥에 내려놓고
포장 사이로 그믐달은 이미 기울었는데
한 잔 건네는 소주도 없이
잔치 사라지고 국수만 먹고 있다
파를 다듬고 생선 살을 발라내어
치자빛 전을 부치던 그 봄날의
잔치는 어디 가고 빈 그릇만 남았는가
첫날밤을 울리던 새벽 닭장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고
돼지우리를 밝히던 고향의 푸른 별빛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여자는 남은 국물마저 훌훌 다 들이켜고
다시 길을 걷는다
옆구리에 보따리는 꼭 끼고 느릿느릿
발자국도 안 남기고
길 없는 길을
박제영,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그리움이란
마음 한 켠이 새고 있다는 것이니
빗 속에 누군가 그립다면
마음 한 둑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니
비가 내린다, 그대 부디, 조심하기를
심하게 젖으면, 젖어들면, 허물어지는 법이니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마침내 무너진 당신, 견인되고 있는 당신
한 때는 ‘나’이기도 했던 당신
떠나보낸 줄 알았는데
비가 내리는 오후 세 시
나를 견인하고 있는 당신
최영철, 이 세상 사람에게
사랑이여 그대를 잠시라도 마음 아프게
혼자서는 돌아설 수 없구나
그대들 부러 쭈빗거리며 저녁상을 차리고
숟갈 놓기 바쁘게 먼 길 떠나려 할 때
부디 억센 손길로 막아다오
우리들 안타까운 그리움 때문만은 아니다
막차를 보내고 추위에 떨며
내밀히 서성거린다 그대들 아름다움에
이 밤 몸 섞지 못하고 쓴 담배 나눠 피우며
불 꺼진 들판과 다함없이 팔 벌린
어둠으로 버려진 채
바라보며 세상은 끝없이 들판 속 어둠에도
한 가닥 길은 있으나 사랑이여
우리 어찌 나아갈 수 있으랴
그대들 숱한 그리움 바람으로 흩어져
긴 밤 내 떠돌게 할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