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호열, 강물에 대한 예의
아무도 저 문장을 바꾸거나 되돌릴 수는 없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 이야기인지
옮겨 적을 수도 없는 비의를 굳이 알아서 무엇 하리
한 어둠이 다른 어둠에 손을 얹듯이
어느 쪽을 열어도 깊이 묻혀버리는
이 미끌거리는 영혼을 위하여 다만 신발을 벗을 뿐
추억을 버릴 때도
그리움을 씻어낼 때도 여기 서 있었으나
한 번도 그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구나
팽팽하게 잡아당긴 물살이 잠시 풀릴 때
언뜻언뜻 비치는 눈물이 고요하다
강물에 돌을 던지지 말 것
그 속의 어느 영혼이 아파할지 모르므로
성급하게 건너가려고 발을 담그지 말 것
우리는 이미 흘러가기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었던가
완성되는 순간 허물어져 버리는
완벽한 죽음이 강물로 현현되고 있지 않은가
박노해, 나는 순수한가
찬 새벽
고요한 시간
나직이 내 마음 살피니
나의 분노는 순수한가
나의 슬픔은 깨끗한가
나의 열정은 은은한가
나의 기쁨은 떳떳한가
오 나의 강함은 참된 강함인가
우주의 고른 숨
소스라쳐 이슬 털며
나팔꽃 피어나는 소리
어둠의 껍질 깨고
동터오는 소리
나혜경, 모과의 낙법
쿵
내 앞에서 모과가 떨어졌다
한 그루 모과나무에 딱 한 개
그것으로 진짜 모과나무였음을 알린
모과 한 알
천둥 번개에도 끄떡없더니 노랗게 익자
다 이루었다며
나무 한 그루의 짐을
저리도 단호하게 부린다
잠시 멈춰서 목례를 한다
어이쿠, 쿵
세상 짐을 다 내려놓기 전, 아버님은
고요하게 아랫목을 지키셨다
식구들이 물들기를 기다린 걸까
세찬 바람이 꼭지를 흔들어도 흔들림 없더니
한 잎 두 잎 식구들이 익어가자 유언도 없이
안심한 듯 가지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흙처럼 아버님을 다 받아 안지도 못한
식구들의 곡소리만 숲처럼 울창했다
집 앞 은행나무는 이듬해 봄까지 목례를 했다 한다
안도현, 마늘밭 가에서
비가 뚝 그치자
마늘밭에 햇볕이 내려옵니다
마늘순이 한 뼘씩 쑥쑥 자랍니다
나는 밭 가에 쪼그리고 앉아
땅 속 깊은 곳에서
마늘이 얼마나 통통하게 여물었는지 생각합니다
때가 오면
혀 끝을 알알하게 쏘고 말
삼겹살에도 쌈 싸서 먹고
장아찌도 될 마늘들이
세상을 꽉 껴안고 굵어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박재희, 조약돌
돌은 큰물이 내려올 때마다
도랑바닥을 온뭄으로 흔든다
물살에 구르고 깎이며
돌은 속으로 자란다
점점 작아질수록
연륜이 쌓이는 돌
화창한 봄날
엄마와 시냇가에 놀러 나온
아가의 손에
꽉
잡혀 있는 조약돌
천 년 굴러온 세월이
움찔 멈춰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