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제2연평해전 당시 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등 6명이 세상을 떠났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이들에게 지급된 보상금은 1인당 3000만원에서 7000만원에 불과했다. 보상금 액수에 대해 논란이 일자 정부는 유가족에게 국민성금 등을 걷어 우회적인 방법으로 4억원규모의 위로금을 지급했다.
당시 이들에게 적용된 보상근거는 군인연금법 체계하의 '공무상 사망자'였다. 2002년 당시 군인연금법 체계에서 '순직'과 '전사'가 구분돼있지 않아서였다. 2004년 군인연금법이 개정돼 '전사'와 '일반공무에 의한 사망'이 구분되기 시작했지만 형평성을 이유로 소급적용받지 못했다.
전사자든 공무상 사망자든 이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체계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보상체계보다 더 큰 문제는 군인과 경찰은 국가를 향해 배상을 할수 없다는 점이다. 헌법 제29조 2항에 명시된 '군·경 배상청구 금지 조항' 때문이다.
우리나라 헌법 제 29조 2항에는 '군인·군무원·경찰공무원 기타 법률이 정하는 자가 전투·훈련등 직무집행과 관련하여 받은 손해에 대하여는 법률이 정하는 보상외에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인한 배상은 청구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반면 헌법 제29조 1항은 '공무원의 직무상 부당행위로 손해를 받은 국민은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정당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군인과 군무원, 경찰공무원만 '보상금'외에 별도의 '배상청구'는 할수 없도록 한 것이다.
군인과 경찰 등의 국가배상 청구를 금지한 조항은 1967년에 만들어졌다. 애초에는 '헌법'이 아니라 '국가배상법'에 명시돼 있었다. 1964년부터 베트남전에 파병한 군인들이 국가의 '보상금' 외에 별도의 배상금을 청구하지 못하도록 막기위해 박정희정권이 '국가배상법'을 개정한 것이다.
그러나 1971년 대법원은 이 조항을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보상금은 사회보장적 성격을 갖는 반면, 국가배상법에 의한 배상금은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의 성격을 갖기 때문에 양자는 그 성격이 다르다는 이유에서였다. 대법원은 또 군인 등에 대한 국가배상청구권의 제한은 다른 공무원에 대한 형평성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기본권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국가배상법 단서조항에 대하여 위헌결정을 내렸다.
대법원이 위헌판결을 내리자 박정희정권은 1972년 유신헌법을 제정하면서 이 조항을 헌법조항으로 만들었다. 이유는 역시 부상당한 군인들이 국가배상을 청구하는 것을 막아 국고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군사정권이 종식되고 대통령 직선제를 이끈 1987년 개헌에서도 이 조항은 살아남았다.
헌법학자이자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에서 개헌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이상돈 국민의당 의원은 "당시는 군사정권의 독재를 이제 막벗어난 시점이었기 때문에 군인·경찰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며 "1987년 개헌 당시에도 이 이부분을 없애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지만 당시 야당의 반대로 그대로 남게됐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군인과 경찰은 국가를 위해 싸우다 다치거나 숨지더라도 국가에 배상을 청구할수 없고 일반 국민과는 다른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 1993년 6월 경기도 연천의 포병사격훈련장에서 폭발 사고로 사망한 현역 장병과 예비군 19명의 유가족도 이 조항 때문에 배상을 받지 못했다
다행스러운 점은 '위헌판결'까지 받은 이 독소조항이 45년만에 다시 개정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올 1월 발족한 국회 개헌특위에서 이 조항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면서다. 이 의원은 "현재 개헌특위에서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조항중 4당이 거의 유일하게 합의를 본 조항"이라며 "개헌이 이뤄진다면 반드시 개정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이 의원은 "대통령제를 4년 중임제로 할 것인지를 골자로 한 통치구조를 바꾸는 논의가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개헌이 이뤄질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는 단서를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