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할미꽃
손자 손녀
너무 많이 사랑하다
허리가 많이 굽은
우리 할머니
할머니 무덤가에
봄마다
한 송이 할미꽃 피어
온종일 연도(煉禱)를
바치고 있네
하늘 한번 보지 않고
자주빛 옷고름으로
눈물 닦으며
지울 수 없는 슬픔을
땅 깊이 묻으며
생전의 우리 할머니처럼
오래 오래
혼자서 기도하고 싶어
혼자서 피었다
혼자서 사라지네
너무 많이 사랑해서
너무 많이 외로운
한숨 같은 할미꽃
강연호, 건강한 슬픔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랜만이라는 안부를 건넬 틈도 없이
그녀는 문득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그저 침묵했다
한때 그녀가 꿈꾸었던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니었다
나도 그때 한 여자를 원했었다 그녀는 아니었다
그 정도 아는 사이였던 그녀와 나는
그 정도 사이였기에 오래 연락이 없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았는데도 서로 멀리 있었다
전화 저쪽에서 그녀는 오래 울었다
이쪽에서 나는 늦도록 침묵했다
창문 밖에서 귓바퀴를 쫑긋 세운 나뭇잎들이
머리통을 맞댄 채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럴 때 나뭇잎은 나뭇잎끼리 참 내밀해 보였다
저렇게 귀 기울인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로
바람과 강물과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리라
그녀의 울음과 내 침묵 사이로도
바람과 강물과 세월은 또 흘러갈 것이었다
그동안을 견딘다는 것에 대해
그녀와 나는 무척 긴 얘기를 나눈 것 같았다
아니 그녀나 나나 아무 얘기도 없이
다만 나뭇잎과 나뭇잎처럼 귀 기울였을 뿐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나보다는 건강하다는 것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울음을 건넬 수 있다는 것
슬픔에도 건강이 있다
그녀는 이윽고 전화를 끊었다
그제서야 나는 혼자 깊숙이 울었다
이수진, 봄의 왈츠
나그네의 거친 몸짓에
이 몸
잔뜩 주눅이 들어
몇 달을
마음 저 깊은 곳에
숨겨둬야만 했던
연둣빛 분홍빛 음표들
이제 웬만해진 나그네의 몸짓
이즈음 꺼내
사랑하는 이와 흥얼거리며
왈츠를 추고 싶나니
봄비여
우리의 작은 음악 세계로 와
때로는 약하게
때로는 강하게
음표를 두드려줄 수 있겠는가
이승민, 편지
안개비 소슬대면
소리없이 젖어드는 설레임
목이 긴 편지 쓰고 싶네
그리움에 손 내밀어
그대 이름 몇 번이고 끝도 없이
적어 보고
살포시 두 눈 감고
그대 얼굴 떠올리어 두 손으로
만져 보고
게슴츠레 실 눈 떠
그대 고운 입술에 달콤하게
입 맞추고
나올 듯 말 듯 간당거리는
차마 하지 못한 말
사랑이라 적고 싶네
피천득, 이 순간
이 순간 내가
별들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 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 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서 그들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두뇌가 기능을 멈추고
내 손이 썩어가는 때가 오더라도
이 순간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허무도 어쩌지 못할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