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공량, 신록을 보며
눈뜨는 신록의 푸른 물결 속에
감춰진 신비를 나는 읽고 있네
그대 그리움이 저 잎 잎에 살아나
한꺼번에 파도치는 소리를
나는 지금 여기서 듣고 있네
언제나 눈 귀 다 열어놓고 보더라도
지칠 줄 모르고 듣더라도
그 소리 소리 지울 수 없는
시간은 뜨겁게 내 마음에 타고 있네
생의 기쁨과 슬픔 사이
그 울울창창한 맥박
거둘 수 없는 간격에서
시간은 다시 고여
뜨겁게 불타고 있네
모든 잎 잎의 생애가 다 기울어
한꺼번에 와와 소리치면
저 초록의 물결은 벌써
내 마음 밀리고 밀려들어와
소리치는 메아리 곱게
울려 퍼져 오랜 동안
깊은 울림은 계속하여
꽃이 피네
이명윤, 향남우짜
당신은 늘 우동 아니면 짜장
왜 사는 게 그 모양인지
시대적 교양 없이 물어보지 않을게요
그래요, 그래서 우짜라구요
우동이냐 짜장이냐
이제 피곤한 선택은 끝장내 드리죠
짜장에 우동 국물을 부어 태어난 우짜
단짝 같은 메뉴끼리 사이좋게 가기로 해요
화려한 풀코스 고급요리 식당이 진을 친 항남동
눈치 볼 것 있나요 뒷골목 돌아
친구처럼 기다리는 항남우짜로 오세요
꿈틀대는 이마 주름에 꾸깃한 작업복
당신도 면발계층이군요
면발처럼 긴 가난을 말아 올려요
입가에 덕지덕지 짜장웃음 바르고
우동처럼 후루룩 웃어 보세요
후딱 한 그릇 비우고 큰 걸음으로
호주머니의 설움을 빠져 나가야죠
달그락 우동그릇 씻는 소리
가난한 날의 저녁이 달그락 달그락 쉴 새 없이 몰려와요
아저씨 또 오셨네요, 여기 우짜 한 그릇이요
꼬깃한 지폐 들고 망설이다
문을 열고 들어선 얼굴
어쩌겠어요 삶이 진부하게 그대를 속일지라도
오늘도 우짜, 웃자, 라구요
정지용, 별
누워서 보는 별 하나는
진정 멀ㅡ고나
아스름 다치랴는 눈초리와
금(金)실로 잇은 듯 가깝기도 하고
잠 살포시 깨인 한밤엔
창유리에 붙어서 엿보노나
불현듯, 솟아나듯
불리울 듯, 맞아들일 듯
문득, 영혼 안에 외로운 불이
바람처럼 이는 회환에 피어오른다
흰 자리옷 채로 일어나
가슴 우는 손을 여미다
박일, 목련
밤-사이
기척도 없이
하얀 소복 입고
대문 열던 너를
외면하고 싶었다
흠모하는 모든 것들은
바람
혹은
이슬방울
네 사정까지
받아 줄 수 없는 나는
또 하나의 목련
그렇다고 말도 없이 갔니
다시 오거든
흐린 밤에나 오련
네 웃어
달이 될 그날
기별 없어도
대문 열고 기다려주마
복효근, 매화가 필 무렵
매화가 핀다
내 첫사랑이 그러했지
온밤내 누군가
내 몸 가득 바늘을 박아넣고
문신을 뜨는 듯
꽃문신을 뜨는 듯
아직은
눈바람 속
여린 실핏줄마다
피멍울이 맺히던 것을
하염없는 열꽃만 피던 것을
십수삼 년 곰삭은 그리움 앞세우고
첫사랑이듯
첫사랑이듯 오늘은
매화가 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