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관희, 기다림의 노래
기다림이 길면 얼마나 길다고
하나 둘 돌아서고 마는 것일까
가진 것 없는 설움으로 우리가
기다림 속에서 기다림의 노래를 부르며
이제껏 힘겹게 살아왔건만
어인 아쉬움이 그리 깊어
머뭇머뭇 돌아서고 마는 것일까
기다림은 기다림이기에 언제나 오지 않고
우리는 기다림의 덫에 걸려 기다림이 되지만
이것이 우리를 끝도 없이 나아가게 하지 않았는가
날선 바람이 아무리 몰아친다 해도
나는 오늘도 기다림의 나그네 되어
오지 않는 그리움의 주소를 찾아
끝도 없는 기다림의 노래로
스산한 가슴에 사라져 간 벗들 얼굴 새기며
길고 긴 기다림의 편지를 쓴다
기다림이 나를 더욱 기다림으로 꽁꽁 묶을지라도
내 죽는 그 날까지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
가진 것 없는 마음 가득
피어린 나무 한 그루 가꾸리라고
이규리, 가려움증
상처는 아물어 갈 때 자꾸 가렵다고 한다
며칠 전부터 근질거리던 안쪽 팔
흉터를 열어 보면 격렬하게 자신과 다투는
한 사람 있다
신경 섬유 올 사이를 지나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있다
통증을 웃도는 가려움증이라니
나는 저 상처의 무게를 안다
다른 사람의 삶에 간섭했던 허세를 안다
어디가 가려운 것은 부끄러움을 보는 다른 증세이다
진피층이 표피층을 향해 밀어 올리는 전언
긁어 덧나지 않게 시간을 견디어내는 일
상처 속 한 사람이 무기를 내려놓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다
머리카락이 스치는 세포들마다
간질간질, 으으으
아문 상처를 뚫고 나오는 연둣빛 잎사귀들
망설이던 등을 낯선 시간이 밀어 주었다
이영식, 쏙독새에게 부치다
동네 간이우체국에서 시집을 부쳤네
등기도 속달도 아니요
야생화 그려진 우표 두 장 붙여
빨간 우편함에 밀어 넣었다네
내 시집이, 시집가는 곳은
해남 땅끝마을 후박나무가 있는 집
나무늘보 걸음처럼 느릿느릿
내 노래는 해거름 바닷가에 닿겠지
저 아무개 님은 첫날밤 옷고름 풀 듯
내 첫 시집을 펼칠 것인데
기다리던 안부, 알싸한 향기는 무슨
책갈피마다 생의 비린내만 진동할 테지
쏙독쏙독
어둠 썰어놓는 쏙독새 울음소리와 함께
시의 행간을 더듬어갈 사람
그럴수록 내 노래는 속내를 감추고
후박나무 그늘 속으로 잦아들 것인데
애인아, 땅끝이라는 지상의 주소만큼
막막함 끝에 닿는 그리움이 어디 있으랴
별정우체국 먼지 낀 창가에 서서
내 가슴에도 꽃잎 우표 몇 장 눌러 붙이고
바닷가 사서함 어디쯤
쏙독새 울음 쪽으로 귀를 기울여보네
길상호, 물고기는 모두 꽃을 피운다
어두운 저수지에 가 보면 안다
모든 물고기 물과 대기의 중간에
꽃 피워놓고 잠든다는 것을
몸 덮고 있던 비늘 한 장씩 엮어
아가미 빨개지도록 생기 불어넣고
부레의 공기 한 줌씩 묶어
한 송이 꽃 물 위에 띄워 올릴 때
둥근 파장이 인다
둥글게 소리 없는 폭주처럼
수면을 채우는 꽃들
어둠은 그 향기를 맡고 날아들어
동심원의 중심에 배꼽을 맞춘다
수천 년 동안 물고기가 보낸
꽃의 신호를 들은 사람 몇 없다
안테나 같은 낚싯대 드리우고
꽃을 따고 있는 저 사내들도
물고기의 주파수 낚지 못한다
부레 속에 녹여 채워둔
물의 노래와 그 빛깔을
더 멀리 퍼뜨리고 싶어서
오늘도 물고기는 꽃을 피운다
황정숙, 소리나는 꽃
새벽녘에만 핀다는
저 노란 앵초꽃에는
기쁜 이야기가 하나 있다
까치수염좀가지풀 같은 것, 참좁쌀풀 같은 것
기생꽃 같은 것
봄맞이 꽃, 큰앵초 꽃 같은 것에도
저마다 하나씩
기쁜 이야기가 있다
논밭 둑 길가 양지 언덕에
수양버들 물에 발 담그고
몸 가려워 긁어대는 봄날이면
나는
마치, 비눗방울이 터지는것 같은 귀여운 소리
그들이 여는 새벽이 열리는 문소리를 듣는다
습기 있는 숲 가장자리에서
넝쿨넝쿨로 매달린 비눗방울 속으로
제몸을 터트려
온 숲이 몸으로 봄을 알리는 파릇파릇한 소리를
나는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