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자, 게발선인장
한 마디가 끝나면 바로
새 마디가 움트고
마디 마디 이어지는 삶이
허공을 간다
멈춘 듯 나아가는 행진
발끝에 피가 맺힌다
피 맺히도록 허공을 밟다니
방울방울 맺힌 피에 다시 힘을 모아
환하게 불을 켜는 저 지극함
아픔도 슬픔도 이겨낸 후에는
등불이 된다, 꽃이 된다
이홍섭, 진부령
내 그대를 팔베개 해줄 때
내 팔이 꼭 요만큼만 했으면 좋겠네
한계령의 화려함도 한철 지나고
미시령의 폭풍우도 잦아들고
다만, 한 숨결이 다른 숨결로 이어지는 길
그대 지친 머리 기대어 올 때
솜털 같은 자작나무 맥박 뛰는 소리 들리고
온몸이 날개인 나비 한 마리
무장무장 세월을 건너는 소리
진부령 들어가며 한 여자 생각하네
다만, 한 숨결이 다른 숨결로 이어지는 길
길게 팔을 뻗네
이생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
그렇게 넓은 우주공간에
그리도 많은 생물 가운데에서
그리도 흔한 사람들 틈에
너는 여자
나는 남자로 태어나
까닭모를 전쟁을
몇 번씩 치르고도
살아서 사랑한다는 사실
긴 역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우리들에게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재산
너와 내가 살아서
사랑한다는 일은
도종환, 저무는 꽃잎
가장 화려하게 피었을 때
그리하여 이제는 저무는 일만 남았을 때
추하지 않게 지는 일을
준비하는 꽃은 오히려 고요하다
화려한 빛깔과 향기를
다만 며칠이라도 더 붙들어두기 위해
조바심이 나서
머리채를 흔드는 꽃들도 많지만
아름다움 조금씩 저무는 날들이
생에 있어서는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아름다운 날에 대한 욕심 접는 만큼
꽃맺이 한 치씩 커오른다는 걸
아는 꽃들의 자태는
세월 앞에 오히려 담백하다
떨어진 꽃잎 하나
가만히 볼에 대어보는
봄날 오후
한인애, 봄 들판에 서서
사노라면
윗돌 빼서 아랫돌 받치고
아랫돌 빼서 윗돌 받칠 때도 있는거지
하늘 기다리다 지친
묵정밭이라 하여
마음 비었으니 나팔꽃만 심을까
주머니 비었으니 보리만 심을까
고여 있던 봇도랑의 물은
들판으로 이미 달리는데
내 서 있는 땅이 때로 굳었기로
그 푸른 꿈길 잊기야 했으랴
뿌리로 스며든 물기따라
속살거리는 밀어들
그래, 흔들려라도 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