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반, 대숲에 들면
바람 없는 날에도 대숲에 들면
젓대소리 들려오는데
고개 젖히고 보면 한낮에도, 댓잎
별을 만지고 있는데
빽빽한 느낌표 같이 가로막아서는
대숲은 어느새 옷깃 적시기 시작하지요
오래된 상처일수록
가슴에 꽃물 든 묵은 상처일수록
가슴 밖으로 화악
끄집어내어 바람에 헹구는 젓대소리
대금 시나위
마디마디 속살 영근, 쌍골
속 비우고 바람 후려내는 소리는
천년을 그 마음 저미어도
기울다 차오르는 보름달 같은 사랑
지귀(志鬼)의 숨소리 같기도 한데
그러기에, 그 가락
한 줄금 소나기 같이 가슴 훑을 때면
울컥
진한 꽃물 토해내는 거 아니겠는지요
김형영, 무엇을 보려고
무엇을 보려고 그대
들에 나갔더냐
바람이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이더냐
사람에 시달리고 문명에 시달린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하늘이더냐 하늘에
못박힌 어느 별이더냐
집을 버리고
생각을 버리고
그대 무엇을 보려고
들에 나갔더냐
아니면 그대
그대여, 무엇이 이 어두운 밤
길도 없는 길로
그대 발길을 인도하였더냐
홍수희, 마음의 간격
전화 몇 번 하지 않았다고
내가 그대를 잊은 건 아니다
너의 이름을 소리내어 말하지 않는다고
내 마음이 그대를
영영 떠난 것은 아닌 것처럼
그리운 그대여 부디
세상의 수치로
우리들의 사랑을 논하지 말자
중요한 것은
그대와 내 마음의 간격
어느 비 오거나 눈 내리는 날에
홀로 뜨거운 찻잔을 마주 한 날에
그 누구도 아닌 네가 떠오른다면
이미 너는 내 곁에 있는 것
우리의 사랑도 거기 있는 것
이 세상 그 무엇도
너와 나 사이
다정한 마음은 어찌하지 못할 테니
이해인, 꽃 멀미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면
말에 취해서 멀미가 나고
꽃들을 너무 많이 대하면
향기에 취해서 멀미가 나지
살아 있는 것은 아픈 것
아름다운 것은 어지러운 것
너무 많아도 싫지 않은 꽃을 보면서
나는 더욱 사람들을 사랑하기 시작하지
사람들에게도 꽃처럼
향기가 있다는 걸 새롭게 배우기 시작하지
조용순, 아카시아 그리움
그대
지금 그곳에 내 청춘의 향기처럼
싱그러운 향기 풍겨주던
하얀 꽃잎이 멋진 왈츠를 추고 있나요
내 유년의 뜨락에 하얗게 쏟아지던
그 축복의 노래가 그리워서, 목메게 그리워서
차라리 내가 하얀 꽃잎 되어
그대 가슴으로 떨어지는 날입니다
어느 날 차마 말 못해
쿵쿵 뛰는 심장으로 고백하던
내 수줍은 노래가
아카시아 나무 아래서 흐느끼고 있을 때
짙은 매혹의 향기로 그렇게 대변해주던
순정의 꽃 아카시아
이젠 그 하늘 아래서
누구의 노래를 함께 불러주고 있을까
우리 소망의 향기로 황홀하게 도취시키던
아름다운 날들의 순결한 꽃잎이여
사랑의 향기여
침침하게 어두워져 가는 내 눈 속으로도
하얗게 휘날려다오
생의 혼탁한 내음에 지쳐 있는
내 후각의 빈터에도 그 신선한 향기 좀 뿌려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