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윤, 벌초
시간은 복사기 불빛처럼 스치고 달아나요
A4용지처럼 아스라이 쌓여가는 일상을 뒤로 하고
오늘은 아버지, 당신에게 가는 날
어머니는 아버지 머리 깎는 날이라 하시고 아내는
스케줄에 의한 세 번째 집안행사라고 하지요
망자의 침묵도 아랑곳없이 여기저기 무성히 내민 손들을
저는요 아버지 근심이라 생각할게요
오랜 세월 지났어도 안부처럼 자라나는
그래요, 아버지 근심 들어 드리려고 왔어요
아가, 너희들 근심이나 밑동을 치려무나
제초기로 대출이자나 싹둑 자르거라
그렇군요 낼 모레가 또 대목이네요
왜 바람은 빈 호주머니부터 더듬을까요
근심은 잡초보다 빨리 우거져요
수풀 속에서 나비 한 마리 날아올라요
우리 기억은 너울너울 가벼워지고 있나요
거미줄에 걸린 저 벌레
기억상실증에 걸린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네요
죄송해요 아버지, 오래 있진 못하겠어요
저기 길이 한숨처럼 뱉어내는 긴 행렬을 보세요
집으로 오는 길
가지 끝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백일홍을 보았어요
쉬이 잠들지 않는 바람에
고장 난 시계추처럼 머리를 흔들며 앞다투어
가을을 넘고 있었어요
박일, 한 목숨이었다는 생각
말아진 멍석에 남겨진 나락 한 톨처럼
외딴 방에 처박혀
밀린 대본을 외우듯 숨을 들이키네
희미한 거울 앞에
웃음도 묻혀가네
타클라마칸 사막의 모래먼지라도 되어
방을 빠져나오고 싶네
그러한 이때 목련은 지침을 내리며 다녀가네
하루를 살아도 꽃처럼 꽃처럼
지난해 된똥 한번 싸지르고 단방에 숨죽었던 애기똥풀
어렵사리 다시 온 그도 조심히 이르네
백년을 살아도 부디 꽃처럼
온 산 뒤덮는 진달래 꽃은 헛되이 지지않네
영취산 녹음의 절반이
말없이 다녀간 진달래의 겸허한 발자취었다는 사실
며칠 전 분양해온 강아지
날 보고 웃네
는적는적한 땅거미 지기 전 발맞춤을 서두르자하네
생(生)이란 것이
길든 짧든 서로의 안부를 전하고 배려하며
갈 때는 그저 말없이 꽃처럼 다녀가야 하리라는
한낮의 얕으나 깊은 각인
정진호, 양파 껍질을 벗기는 사람들
벗깁니다
가장 바깥쪽의 말라붙은 얇은 껍질을
벗길수록 속살 하얀 반드러운 겹들을
다 까도 속 알맹이는 어디에도 없지만
우린, 살아있는 거짓의 양심을 벗겨내고
때로는 시의 나무 아래서 양심을 손질하여도
때 묻은 양심 한 자락을 벗겨내진 못 합니다
벗겨도 속절없이 또 묻은 채 삶을 살아지지만
양파 껍질처럼 착 달라붙는 미운 양심을
도무지 떼어낼 수 없어, 그 삶이 아름답습니다
저녁상에 올라온 양파의 향이 식욕을 자극하듯
기대에 찬 양심들이 모여 따뜻한 세상을 만들듯
오늘도 저마다 사람들이 양파 껍질을
벗깁니다
도종환, 바람이 그치면 나도 그칠까
바람이 그치면 나도 그칠까
빗발이 멈추면 나도 멈출까
몰라 이 세상이 멀어서 아직은 몰라
아픔이 다하면 나도 다할까
눈물이 마르면 나도 마를까
석삼년을 생각해도 아직은 몰라
닫은 마음 풀리면 나도 풀릴까
젖은 구름 풀리면 나도 풀릴까
몰라 남은 날이 많아서 아직은 몰라
하늘 가는 길이 멀어 아직은 몰라
류시화, 그건 바람이 아니야
내가 널 사랑하는 것
그건 바람이 아니야
불 붙은 옥수수밭처럼
내 마음을 흔들며 지나가는 것
그건 바람이 아니야
내가 입 속에 혀처럼 가두고
끝내 하지 않은 말
그건 바람이 아니야
내 몸 속에 들어 있는 혼
가볍긴 해도 그건 바람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