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석창, 간이역
비둘기호 열차를 탄
우리 인생 속절없이 흔들리고
혹은 남루하게 흔들리고
몇몇 친구들
쪽팔리게 살기 싫다며
간이역에서 내렸다
잘 가라, 씨방새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흰 상복을 입은 여름이
안개와 더불어 조문 왔다 가고
간이역 모퉁이 빈 가지엔
찢어진 비닐 조각 만장처럼 나부꼈다
내 인생 아직도 비둘기호 열차를 타고
안개 속에서 흔들리고 있다
천양희, 한 아이
시냇물에 빠진 구름 하나 꺼내려다
한 아이 구름 위에 앉아 있는 송사리떼 보았지요
하르르 흩어지는 구름떼들 재잘대며
물장구치며 노는 어린 것들
샛강에서 놀러 온 물총새 같았지요
세상의 모든 작은 것들, 새끼들
풀빛인지 새 소린지 무슨 초롱꽃인지
뭐라고 뭐라고 쟁쟁거렸지요
무엇이 세상에서
이렇게 오래 눈부실까요
강경주, 환청(幻聽)
긴가민가 하다가
꽃묘를 뽑고 말았다
서러운 햇살들이 아르르 몰려오고
영혼이 붉은 아가야
울음소리 들린다
이호우, 개화(開花)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심재휘, 편지, 여관, 그리고 한 평생
후회는 한 평생 너무나 많은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세월이 더러운 여관방을 전전하는 동안
시장 입구에서는 우체통이 선 채로 낡아갔고
사랑한다는 말들은 시장을 기웃거렸다
새벽이 되어도 비릿한 냄새는 커튼에서 묻어났는데
바람 속에 손을 넣어 보면 단단한 것들은 모두 안으로 잠겨 있었다
편지들은 용케 여관으로 되돌아와 오랫동안 벽을 보며 울고는 하였다
편지를 부치러 가는 오전에는 삐걱거리는 계단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는데 누군가는 짙은 향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슬픈 일이었지만
오후에는 돌아온 편지들을 태우는 일이 많아졌다
내 몸에서 흘러나간 맹세들도 불 속에서는 휘어진다
연기는 바람에 흩어진다
불꽃이 '너에 대한 내 한때의 사랑'을 태우고
'너를 생각하며 창밖을 바라보는 나'에 언제나 머물러 있다
내가 건너온 시장의 저녁이나
편지들의 재가 뒹구는 여관의 뒷마당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나를 향해 있는 것들 중에 만질 수 있는 것은 불꽃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한 평생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