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하림, 모자도 쓰지 않고
모자도 쓰지 않고 신발도
신지 않고 그리운 그대
건들건들 들녘을 넘어가네
저녁 바람에 의지해서 가네
돌아보면 길들은 잡초에 묻힌 채로
구불거리며 흘러가고 한밤중에는
달과 함께 마을에 떠올라
골목을 비추네 골목이
포물선을 그리면서
하구로 흘러가고
질그릇들이 둥둥 떠서
썰물 같은 고요를 한 아름
안고 있네 슬픔 안 사람이
새벽 일찍 오리백숙탕 집을 빠져나와
그의 길을 가네 나무에 앉은
새들이 푸드덕 날아가네
새들을 보며 그리운 그대
건들건들 가네
한택수, 나의 삶 저편에는
나의 삶 저편에는 강릉의 햇볕이
다사로이 비치어라
소나뭇가지 그늘을 지어
이름 모를 들꽃도 낮잠에 들고
새들은 노래하듯
쉬어라
나의 삶 저편에는
아이야
아버지의 어리석음을 깨우치지 말고
너의 삶을 꿈꾸듯
나의 노래를
들어라
나의 삶 저편에는 강릉의 햇볕이
안재동, 나무와 바람
바람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선 나무는 고독하지 않다
바람이 때때로
나무의 곤한 밤잠을 깨우거나
술취한 듯 비틀거리며 다가와
몸을 심하게 흔드는 심술 때문에
나무는 여간 짜증스럽지 않지만
바람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전해주기도 하고
한여름 삼복더위를 시원하게
식혀주기도 한다 그래서 때론
나무가 바람을 기다리기도 한다
그러나
나무는 바람을 좋아하진 않는다
여름날엔 가끔
바람이 노기 띤 얼굴로 들이닥쳐
주위에 있는
작은 나무들의 몸통을 뿌리째
뽑아놓고 사라지곤 했기 때문이다
나무는 바람을 믿지도 않는다
한 번 지나간 바람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나무는 항상 처음 보는 바람과
악수를 나눈다
기형도, 겨울, 눈, 나무, 숲
눈은
숲을 다 빠져나가지 못하고
여기저기 쌓여 있다
"자네인가
서둘지 말아"
쿵, 그가 쓰러진다
날카로운 날인을 받으며
나는 나무를 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홀로 잔가지를 치며
나무의 침묵을 듣는다
"나는 여기 있다
죽음이란
가면을 벗은 삶인 것
우리도, 우리의 겨울도 그와 같은 것"
우리는
서로 닮은 아픔을 향하여
불을 지피었다
창 너머 숲속의 밤은
더욱 깊은 고요를 위하여 몸을 뒤채인다
내 청결한 죽음을 확인할 때까지
나는 부재(不在)할 것이다
타오르는 그와 아름다운 거리를 두고
그래, 심장을 조금씩 덥혀가면서
늦겨울 태어나는 아침은
가장 완벽한 자연을 만들기 위하여 오는 것
그 후에
눈 녹아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
우리의 봄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김영승, 나팔꽃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은
뒷뜰 나무담장에서도 보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은
밤새도록 하늘은 썩고
하늘은 물이 되고
물이 되어 맺힌다 눈물이 되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이 되어
빨간 살점 위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 위에
그리고 웃는다
찢어진 나뭇잎 새로
햇살은 방울방울 구비구비 흐르고
내가 입술을 대기 전에
벌써 떨린다
내가 입술을 대면
주르륵 흐르는 눈물
그러나 나는 먼저 울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은
빨갛게 타오르다가
내가 입술을 떼기 전에
내 발에 밟힌다
그리고는 또 언제나 그랬던 여름을 보내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