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여행, 스무살의 열차
너는 차창 위로 그림을 그리다
새벽보다 축축한 잠에 빠졌다
그림자 같이 어둡게 기운 어깨 아래
네 손은 얇은 책장처럼 떨렸고
나는 첫 장을 넘기듯 조심스레
작은 네 손에 뜨거운 지문을 새겼다
밤바람 달리는 녹슨 철로는
별빛 스러지는 안개의 통로이자
누군가 밟고 지나간 질척한 눈길
열차는 흐릿한 눈을 뜨고
쓸쓸한 어둠을 향해 주행을 재촉했다
무서운 꿈이 가슴을 짓누르는 밤
너는 엷은 숨을 내쉬는 어린아이처럼
내 어깨에 피곤한 머리를 기대고 잠들었다
열차가 기억의 간이역을 지나자
하늘의 뒷면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눈을 뜬 아침은 죽음 같은 잠을 깨부숴
어둔 너의 그림 위에 밝은 물감을 덧입혔다
열차가 멈춰 서자 우리는
아지랑이 같은 입김을 일으켜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갈색 언덕을 향해 달려갔다
우리의 숨결을 잠재울 계절이 오기 전
벌써 내일의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향아, 9월이 오면
옛날에 본 서양 영화 '9월이 오면'이 생각난다
9월이 오면
등불을 높이 켜단 낯익은 문간
옥빛으로 가라앉은 거울 앞으로
고개 숙여 가만히 돌아오겠노라는
9월이 오면
지난 여름 흐느낌은 묻어버리고
소식처럼 불어오는 소슬한 바람
내 속에서 천천히 일어서겠노라는
그런 내용이었을 거다, 아마
그 시절 나는 어리고 꿈은 어여뻤었다
풋나물 분내 번지는 땅끝 어딘가
금단추 별을 따듯 서성이곤 했었다
9월이 오면
9월이 오면
그 후로도 9월은 해마다 와서
아직도 못다 사룬 꿈을 밝히고
분별없이 가슴을 울렁이게 한다
신석정, 내일을 생각하고
8월에 못다한 우리들의 이야긴
아예 뜨거운 가슴에 간직하고 말자
9월 하늘을 스쳐가는 구름을 불러
조용조용 뛰어 보내도 좋겠지
이윽고는 고동색으로 물들을
낙우송 가는 가지 사이로 흘러올
저 쪽빛 9월 하늘을 어루만지며
우리들의 마음을 띄워 보내도 좋겠지
투박한 석류가 상달을 앞질러
날로 파열을 도모하는 뜨락에
대숲에 드는 소슬한 바람을 재우고
다하지 못한 우리들의 이야기도 재우고
진져꽃 향기 지치게 달려드는 날엔
추석날처럼 즐겁게 인생을 생각하고
언젠가 빛나야 할 내일을 생각하고
오늘은 베토벤의 운명이라도 들어야지
엄원태, 애월
하귀에서 애월 가는 해안도로는
세상에서 가장 짧은 길이었다
밤이 짧았다는 얘긴 아니다
우린 애월포구 콘크리트 방파제 위를
맨발로 천천히 걷기도 했으니까
달의 안색이 마냥 샐쭉했지만 사랑스러웠다
그래선지, 내가 널 업기까지 했으니까
먼 갈치 잡이 뱃불까지 내게 업혔던가
샐쭉하던 초생달까지 내게 업혔던가
업혀 기우뚱했던가, 묶여 있던
배들마저 컴컴하게 기우뚱거렸던가, 머리칼처럼
검고 긴, 밤바람 속살을 내가 문득 스쳤던가
손톱반달처럼 짧아, 가뭇없는 것들만
뇌수에 인화되듯 새겨졌던 거다
이젠 백지처럼 흰 그늘만 남았다
사람들 애월, 애월 하고 말한다면
흰 그늘 백지 한 장, 말없이 내밀겠다
정호승, 유기견
하늘이 보시기에
개를 버리는 일이
사람을 버리는 일인 줄 모르고
사람들은 함부로 개를 버린다
땅이 보시기에
개를 버리는 일이
어머니를 버리는 일인 줄 모르고
사람들은 대모산 정상까지
개를 데리고 올라가
혼자 내려온다
산이 보시기에도
개를 버리는 일이
내 생을 버리는 일인 줄 모르고
사람들은 거리에 개만 혼자 내려놓고
이사를 가버린다
개를 버리고 나서부터
사람들은 사람을 보고
자꾸 개처럼 컹컹 짖는다
개는 주인을 만나려고
떠돌아다니는 나무가 되어
이리저리 바람에 흔들리다가
바람에 떠도는 비닐봉지가 되어
이리저리 거리를 떠돌다가
마음이 가난해진다
마음이 가난한 개는
울지 않는다
천국이 그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