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래, 추일(秋日)
나직한 담
꽈리 부네요
귀에 가득
갈바람 이네요
흩어지는 기적(汽笛)
꽃씨뿐이네요
정다혜, 스피노자의 안경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아내의 안경을 닦는 남자
오늘도 안경을 닦아
잠든 내 머리맡에 놓고 간다
그가 안경을 닦는 일은
잃어버린 내 눈을 닦는 일
그리하여 나는 세상에서 가장 푸른
새벽과 아침을 맞이하지만
그때마다 아픔의 무늬 닦아내려고
그는 얼마나 많은 눈물 삼켰을까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안경의 렌즈를 갈고 닦았다는
철학자 스피노자
잃어버린 내 한쪽 눈이 되기 위해
스피노자가 된 저 남자
안경을 닦고 하늘을 닦아
내 하루 동안 쓴 안경의
슬픔을 지워, 빛을 만드는
저 스피노자의 안경
유안진, 가을 편지
들꽃이 핀다
나 자신의 자유와
나 자신의 절대로서
사랑하다가 죽고 싶다고
풀벌레도 외친다
내일 아침 된서리에 무너질 꽃처럼
이 밤에 울고 죽을 버러지처럼
거치른 들녘에다
깊은 밤 어둠에다
혈서를 쓰고 싶다
이기와, 귀소본능
1772번 철새가 날아왔다
기별도 없이 수 백 킬로를 쉬지 않고
허공에 박치기하며 날아왔다
“아직 초가을인데 뜻밖이군요”
내 생각보다 앞질러 출소한 철새와
중간 도래지인 내 집 잡풀 우거진 마당에 앉아
막김치에 막걸리 들이킨다
사구처럼 눈두덩이 붉게 부어오른 철새가 운다
그동안 사람이 무지 그리웠어요
이제 정신차리고 돈만 벌거예요
인간이라면 멸치똥처럼 발라내고 싶은
돈이라면 사지를 찢어발기고 싶은 내 앞에서, 운다
덤덤한 내 눈빛을 알타리무처럼 오도독 오도독
씹어 먹으며 굳은 각오로 정신을 소독하더니
달포만에, 절도 9범 이제는 10범
2022번 새 번호를 달고 허공에 박치기하며
온 곳으로 다시 날아갔다
거참, 속 터지네
새장 문을 열어 줘도 날아가지 못하는
멍텅구리새
백 개의 열쇠로도 자유의 금고를 털지 못하는
도둑 같지 않은 도둑, 새 같지 않은 새
문태준, 그 맘 때에는
하늘에 잠자리가 사라졌다
빈 손이다
하루를 만지작만지작 하였다
두 눈을 살며시 떠 보았다
빈 손이로다
완고한 비석 옆을 지나가 보았다
무른 나는 금강(金剛)이라는 말을 모른다
그 맘 때가 올 것이다, 잠자리가 하늘에서 사라지듯
그 맘 때에는 나도 이곳에서 사르르 풀려날 것이니
어디로 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 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 갔을까
후두둑 후두둑 풀잎에 내려앉던 그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