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칠환, 은행나무 부부
십 리를 사이에 둔 저 은행나무 부부는 금슬이 좋다
삼백년 동안 허운 옷자락 한 번 만져보지 못했지만
해마다 두 섬 자식이 열렸다
언제부턴가 까치가 지은 삭정이 우체통 하나씩 가슴에 품으니
가을마다 발치께 쏟아놓는 노란 엽서가 수천 통
편지를 훔쳐 읽던 풋감이 발그레 홍시가 되는 것도 이때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삼백 년 동안 내달려온 신랑의 엄지발가락이 오늘쯤
신부의 종아리에 닿았는지도
바람의 매파가 유명해진 건 이들 때문이라 전한다
김현승, 창
창을 사랑한다는 거은
태양을 사랑한다는 말보다
눈 부시지 않아 좋다
창을 잃으면
창공으로 나아가는 해협을 잃고
명랑은 우리에게
오늘의 뉴스다
창을 닦는 시간은
또 노래도 부를 수 있는 시간
별들은 십이월의 머나먼 타국이라고
창을 맑고 깨끗이 지킴으로
눈들을 착하게 뜨는 버릇을 기르고
맑은 눈은 우리들
내일을 기다리는
빛나는 마음이게
안오일, 빛무덤
빛은 무덤이다
들어간 길로 나오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전구를 갈아 끼우기 위해
전등갓을 벗겨보니
메뚜기 한 마리 벌러덩 누워 있다
아무리 봐도 들어갈 틈이 없는데
이 '좁은 문'을 어떻게 통과했을까
빛사래의 유혹에 앞만 보고 달려들었을
그의, 몸부림친 흔적이 적나라하다
검게 그을려 바삭거리는 날개
풀잎에서 풀잎으로 건너 뛰어다녔을
긴 두 다리 바싹 웅크린 채
잘 마른 미이라가 되어 있다
메뚜기도 몰랐겠지
먹기 좋게 차려진 그 환한 먹이가
무덤이 될 줄은
한껏 그를 비추다가
지글지글 태워버리는
그 빛이 내 앞에 눈부시다
김병호, 어제의 무늬
난망한 밤을 보낸 당신이
새벽길을 밟아 바랑을 지고 떠난 뒤
산의 주름들은 가을빛 속에서 풍금소리를 내며
부풀었다 꺼지고 다시 부풀어 오르고
그 숨 속에서 움을 틔우고 잎사귀를 기르며
열매를 맺어온 고단하고 환희에 찬 어제의 무늬들
첩첩의 산들이 와르르와르르
파도치는 소리로 물결쳐가고
동해 깊은 바닷물 속에
찬란한 능선을 거느리고 앉은 첩첩의 산봉우리들
하룻밤을 백년처럼, 한 사나흘 살고 나면
그 마음, 돌을 낳고 나무를 낳고 구름을 낳고
첫울음 싱싱한 아이를 낳아
내 몸이 깜깜하여 차마 열어줄 수 없었던 마음
진작 오려 주었다 할 수 있을까
유종인, 아껴 먹는 슬픔
재래식 화장실 갈 때마다
짧게 뜯어가던 두루마리 화장지들
내 밑바닥 죄를 닦던 낡은 성경책이 아닐까
떠올린 적이 있다
말씀이 지워진 부드럽고 하얀 성경책 화장지
외경의 문밖에서서 누군가 나를
노크할 때마다 나는
아직 죄를 배설 중입니다 다시
문을 두드려주곤 하였다
바닥난 화장지, 어느 날 변기에 앉아
내 죄가 바닥나버린 허탈에 설사라도 나는
기분에 울먹인 적이 있다
그러나, 천천히 울어야지
저 문밖의 가을, 깃동잠자리 날개 무늬를 살필 수 있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머리에 토란잎 쓰고 가는 아이처럼
슬픔에 비 맞아 가는 것도
다 구경인 세상이듯이
때론 맨발에 질퍽이는 하늘을 적시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