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숙, 시를 먹고 사는 일
시를 먹고 사는 일은 쓸쓸하다
헛헛한 삶을 일으켜 숟가락으로 눈물을 떠 내는 것
혼자 앉은 식탁에 빈자리 하나쯤 마련해 두고
그릇 가득 별빛을 담아 놓는 일이다
누군가는 밥을 먹으라고 했지만
뜨끈한 양푼에 꽂는 서툰 숟가락질은 덜거럭 소리를 내고
밥을 삼킨 목울대에서는 울컥 눈물이 솟는 것이다
시를 먹고 밤하늘에 나 앉으면
별빛이 눈동자에 와 스며들고
눈물은 꽃송이 되어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른다
사람들은 소리없이 걸어와
함께 시를 나누어 먹고 가난해진 마음으로
떠나간 사랑을 축복하며 머물다 간다
조병화, 사랑의 노숙(露宿)
너는 내 사랑의 숙박이다
인생은 내 슬프고 즐거운 작은 사랑의 숙박이다
우리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
인생은 하루의 밤과 같이 사라져 가는 것이다
견딜 수 없는 하루의 밤과 같은 밤에
우리는 사랑 포옹 결합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인간이다
너는 내 사랑의 유산이다
너는 내 온 존재의 기억이다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가난한 인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그대로 떠나야 하는 생명
너는 그대로 있어라
우리가 가고 내가 가고 사랑이 사라질지라도
너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라
때 오면 너도 또한 이 세상에 사랑을 남기고 가거라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과 숨가쁜 밤과 사랑을 남기고
가난히 자리를 떠나라
지금 이 순간과 같이 나와 같이
너는 이 짧은 사랑의 숙박이다
너는 내 짧은 생존의 기억이다
도종환, 등잔
심지를 조금 내려야겠다
내가 밝힐 수 있는 만큼의 빛이 있는데
심지만 뽑아올려 등잔불 더 밝히려 하다
그을음만 내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잠깐 더 태우며 빛을 낸들 무엇하랴
욕심으로 타는 연기에 눈 제대로 뜰 수 없는데
결국은 심지만 못 쓰게 되고 마는데
들기름 콩기름 더 많이 넣지 않아서
방안 하나 겨우 비추고 있는 게 아니다
내 등잔이 이 정도 담으면
넉넉하기 때문이다
넘치면 나를 태우고
소나무 등잔대 쓰러뜨리고
창호지와 문설주 불사르기 때문이다
욕심부리지 않으면 은은히 밝은
내 마음의 등잔이여
분에 넘치지 않으면 법구경 한권
거뜬히 읽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의 빛이여
최영미, 내 속의 가을
바람이 불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높고 푸른 하늘이 없어도
뒹구는 낙엽이 없어도
지하철 플랫폼이 앉으면
시속 100킬로로 달려드는 시멘트 바람에
기억의 초상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흩어지는
창가에 서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따뜻한 커피가 없어도
녹아드는 선율이 없어도
바람이 불면
오월의 풍성한 잎들 사이로 수많은 내가 보이고
거쳐온 방마다 구석구석 반짝이는 먼지도 보이고
어쩌다 네가 비치면 그림자 밟아가며, 가을이다
담배연기도 뻣뻣한 그리움 지우지 못해
알미늄 샷시에 잘려진 풍경 한 컷, 우수수
네가 없으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팔짱을 끼고
가-을
정현종, 새로운 시간의 시작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순간을 보아라
하나둘 내리기 시작할 때
공간은 새로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늘 똑같던 공간이
다른 움직임으로 붐비기 시작하면서
이색적인 선(線)들과 색깔을 그으면서, 마침내
아직까지 없었던 시간
새로운 시간의 시작을 열고 있다
그래 나는 찬탄하느니
저 바깥의 움직임 없이 어떻게
그걸 바라보는 일 없이 어떻게
새로운 시간의 시작이 있겠느냐
그렇다면 바라건대 나는 마음먹는 대로
모오든 그런 바깥이 되어 있으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