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하, 겨울 나무
그대가 어느 모습
어느 이름으로 내 곁을 스쳐 지나갔어도
그대의 여운은 아직도 내 가슴에
여울되어 어지럽다
따라나서지 않은 것이
꼭 내 얼어붙은 발 때문만은 아니었으리
붙잡기로 하면 붙잡지 못할 것도 아니었으나
안으로 그리움 삭일 때도 있어야 하는 것을
그대 향한 마음이 식어서도 아니다
잎잎이 그리움 떨구고 속살 보이는 게
무슨 부끄러움이 되랴
무슨 죄가 되겠느냐
지금 내 안에는
그대보다 더 소중한 또 하나의 그대가
푸르디 푸르게 새움을 틔우고 있는데
도종환,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저녁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 보다는
동짓달 스무 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음 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 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황동규, 꿈꽃
내 만난 꽃 중 가장 작은 꽃
냉이꽃과 벼룩이자리꽃이 이웃에 피어
서로 자기가 작다고 속삭인다
자세히 보면 얼굴들 생글생글
이빠진 꽃잎 하나 없이
하나같이 예쁘다
동료들 자리 비운 주말 오후
직장 뒷산에 앉아 잠깐 조는 참
누군가 물었다. 너는 무슨 꽃?
잠결에 대답했다. 꿈꽃
작디작아 외롭지 않을 때는 채 뵈지 않는
(내 이는 몰래 빠집니다)
바로 그대 발치에 핀 꿈꽃
정희성, 태백산행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
태백에 가야겠다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등 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
지가 열일곱 살이야 열여덟 살이야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칠십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일곱이라고
그중 한사람이 말하기를
조오흘 때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
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
좋을 때다 좋을 때다
말을 받는다
당골집 귀때기 새파란 그 계집만
괜스레 나를 보고
늙었다 한다
조인선, 사랑하는 이에게
빛과 빛이 싸우고 있군요
어둠이 생길 거예요
시간과 바람이 껴안고 있어요
물이 생긴답니다
하늘엔 적막한 기운이 감돌고
땅에는 쓸쓸한 감촉뿐이지만
그대 몸에는 불이 생기는 군요
자 이제 눈을 감고 누군가 불러보아요
어둠 속에서 한 방울이 흐를 거예요
차가운 얼음이 뜨뜻하게 느껴지면
뜨거운 화로가 차갑게 느껴지면
그대 귀에는 아주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릴 거예요
누군가 몹시도 애타게 부르는 소리지요
산에서 바다에서 그리고 그대의 빛나는 눈동자에서
별이 뜨는 소리지요
세상은 살 만한 곳이 아니라 믿는 그대 가슴에
왜 사나 하는 한숨이 몹시도 강하게 일어나면
그때 별이 뜨는 소리에
나뭇잎이 피어나고 꽃이 꿈틀거리는 거지요
나 이제 그대와 어느 누구와도 싸우지 않을 거예요
사랑은 원래 없으니까요
그래요 나는 떠나지도 못하고 남지도 않겠지만
바람이 어둠에서 내 이름 찾을 거예요
그때 내 미소 한 번 보고
눈 감으면 그대 할 일을 다했다고
살아야겠다고 고개 숙여
다시 한 번 살아봐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