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식, 안흥찐빵
눈발 휘날리는 날
42번 국도읍 소읍에 닿았습니다
입구에서 부터 빵 익는 냄새
한 마을이 온통 빵으로 부풀다니
우리는 팥알처럼 오종종 모여
희고 둥근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누구에게나 덥석 배를 갈라주는
씹을 수록 허기지는 그리움
세월 저쪽 어디쯤 묻혀 있었던
발자국들이 떠올라, 울컥
목이 메었습니다
서안나, 구석에 관하여
구석은 모퉁이의 안쪽이다
그대 혹은 내 마음의 안쪽이다
내가 세상을 이탈한 흔적이다
구석은 속닥거린다
구석은 키스를 만들고 눈물을 만든다
아이들이 구석으로 숨어들어 간다
구석은 커다란 자궁이다
구석은 구석을 밀어내지 않는다
구석과 구석이 만나 집을 일으킨다
뿌리가 깊다
거대한 뿌리로 중심을 일으켜 세운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수많은 중심이 모여 산다
당신에게도 구석이 있다
김소월, 비단 안개
눈들이 비단 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차마 잊지 못할 때러라
만나서 울던 때도 그런 날이오
그리워 미친 날도 그런 때러라
눈들이 비단 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홀목숨은 못살 때러라
눈 풀리는 가지에 당치맛귀로
젊은 계집 목매고 달릴 때러라
눈들이 비단 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종달새 솟을 때러라
들에랴, 바다에랴, 하늘에서랴
아지 못할 무엇에 취(醉)할 때러라
눈들이 비단 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차마 잊지 못할 때러라
첫사랑 있던 때도 그런 날이오
영 이별 있던 날도 그런 때러라
김광규, 밤눈
겨울밤
노천 역에서
전동차를 기다리며 우리는
서로의 집이 되고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
온갖 부끄러움 감출 수 있는
따스한 방이 되고 싶었다
눈이 내려도
바람이 불어도
날이 밝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의 바깥이 되고 싶었다
문정희, 어머니의 편지
딸아, 나에게 세상은 바다였었다
그 어떤 슬픔도
남 모르는 그리움도
세상의 바다에 씻기우고 나면
매끄럽고 단단한 돌이 되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 돌로 반지를 만들어 끼었다
외로울 때마다 이마를 짚으며
까아만 반지를 반짝이며 살았다
알았느냐, 딸아
이제 나 멀리 가 있으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딸아,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뜨겁게 살다 오너라
생명은 참으로 눈부신 것
너를 잉태하기 위해
내가 어떻게 했던가를 잘 알리라
마음에 타는 불, 몸에 타는 불
모두 태우거라
무엇을 주저하고 아까워하리
딸아, 네 목숨은 네 것이로다
행여, 땅속의 나를 위해서라도
잠시라도 목젖을 떨며 울지 말아라
다만, 언 땅에서 푸른 잎 돋거든
거기 내 사랑이 푸르게 살아 있는 신호로 알아라
딸아, 하늘 아래 오직 하나뿐인
귀한 내 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