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 제비꽃
오늘은 개일런지
학생들이 오르기 전
이슬 채 마르지 않은 언덕에 올라가
무심히 누웠다
하늘을 보다 아래를 보니
제비꽃 별처럼 수놓은 푸른 수틀 속에 내가 누워 있었다
수틀이 마르며 내리는 빛발 속에
꽃송이 하나하나가 산들다며 빛난다
곧 사그라들 저 가혹하게 예쁜 놈들
한 놈은 꽃잎 하나가 크고
또 한 놈은 꽃받침이 살짝 이지러졌다
키도 제각기 달라
거의 땅에 붙어 있는 놈도 있다
어느 누구도
옆놈 모습 닮으려 애쓴 흔적 보이지 않는구나
한참 들여다보면
이슬 방울인가 눈물 방울인가 가진 놈
얼굴에 방울 띄우지 않고
가슴에 내려 녹이고 있을 뿐
정진규, 다시 쓰는 연서
사랑이여, 그렇지 않았던가 일순 허공을 충만으로 채우는
경계를 지우는 임계속도(臨界速度)를 우리는 만들지 않았던가
허공의 속살 속으로 우리는 날아오르지 않았던가
무엇이 그 힘이었던가
사랑이라고 말할 수밖에는
최상해, 햇살
씨앗을 어디다 심어 놓았기에
일제히 슴슴슴 일어난다 하는 지
날마다 이물거리며
내 마음 속 다녀가는 소리만
소스락 소스락 거리는 건지
꽃잎 한 장 밀어 올리는
비밀한 떨림처럼
네 앞에 서기만 하면 온 몸에 촉수가 돋는
이른 새벽 발 딛기 전에
내 육신의 세포들 모두 열어
내게 오는 전부를 안고 싶은
구상, 목숨이여
살이 잎새 되고
뼈가 줄기 되어
붉은 피로
꽃 한 떨기 피우는 날엔
비린내 나는 운명도
향내를 풍기오리니
목숨이여
목숨이여
마음이 하늘 같은
겨울이 되어
아마, 님의 얼굴
비최이도록
가슴이 사랑의
도가니 되어
차라리 님의
심장 데우오도록
목숨이여
목숨이여
박소향, 난전에서
깊이 패인 주름 뒤로
깨닫지 못한 과거의 시간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파장의 언저리
한줌 덤으로도 판매되지 않는 생의 혼령 앞에
휘청휘청 맨발로 다가오는 자화상
못다 풀린 꿈들이 우르르 쏟아지는 지금도
눈물은 한줌의 길이 되느니
그래서 길은 또 만들어지고
아직 갈 길이 남아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허기진 옷자락에 꾹꾹 눌러 담은 어둠이
무의식의 언어처럼 끝까지 따라와
파장 난 오늘의 사연들을 쏟아놓아도
꿈이 가는 곳은 다 길이 되기에
골목 저 끝에도 희망이 존재하는 것
희망을 노래하며 우는 사람들아
울면서 절망을 노래하지 말자
눈물은 때로 컬컬한 기침소리마냥 시들해지고
나처럼 신발 벗고 눕고 싶은 저녁이 온다는 건
그래도 낮은 자의 행복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