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만, 대청에 누워
나 이 세상에 있을 땐 한 칸 방 없어서 서러웠으나
이제 저 세상의 구중궁궐 대청에 누워
청모시 적삼으로 한 낮잠을 뻐드러져서
산뻐꾸기 울음도 큰댓자로 들을 참이네
어차피 한참이면 오시는 세상
그곳 대청마루 화문석도 찬물로 씻고
언뜻언뜻 보이는 죽순도 따다 놓을 터이니
딸기 잎 사이로 빨간 노을이 질 때
그냥 빈 손으로 방문하시게
우리들 생은 다 정답고 아름다웠지
어깨동무 들판 길에 소나기 오고
꼴망태 지고 가던 저녁나절 그리운 마음
어찌 이승의 무지개로 다할 것인가
신발 부서져서 낡고 험해도
한 산 떼밀고 올라가는 겨울 눈도 있었고
마늘밭에 북새더미 있는 한철은
뒤엄 속의 김 하나로 맘을 달랬지
이것이 다 내 생의 밑거름 되어
저 세상의 육간대청 툇마루까지 이어져 있네
우리 나날의 저문 일로 다시 만날 때
기필코 서러운 손으로는 만나지 말고
마음 속 꽃그늘로 다시 만나세
어차피 저 세상의 봄날은 우리들 세상
강미정, 짧은 여름밤을 끄다
가로등 불빛 아래 들깨밭
숭숭 뚫린 깻잎 구멍을 불빛이 막아주고 있다
깻잎이 바람에 흔들리자 불빛은
놀라 펄쩍뛰며 허기의 구멍을 보여준다
허겁지겁 주워먹은 배고픔이
숭숭 뚫어놓은 구멍
저 배고픈 구멍 속에서 나도
절망을 벼리며
내 문장의 푸른 문맥 위에
핏발 선 붉은 눈을 얹고
슬피 울고 싶었던 날이 있었던 것처럼
너를 던져보고 싶었던 날이 있었니? 있었니?
짧은 여름밤을 다 갉아먹고 나방이 날아오른다
생의 진창을 튀기며 불빛에 몸을 던지는
나방은 푸른 배고픔을 깻잎 뒤에 슬어놓았다
아직 뚫리지 않은 커다란 구멍을 뚫어 놓았다
저 푸르고 줄기찬 문장을 숭숭숭 뚫는
절망도 모르는 우멍한 구멍
서글퍼라 이 놈의 세상 온통 구멍뿐이네
들깨밭을 바라보던 아낙이 가로등을 끈다
저 많은 구멍을 막아주고 있던
불빛이 툭, 발길에 채여 넘어진다
안상학, 자작나무와 술 한 잔
홀로 술 마신 적 있었던가. 아주 오래 전
사랑을 잃고 술잔 기울인 적 있었던가
자작나무처럼 저 자작나무처럼
태백준령 전설 안고 저잣거리 내려와
희디흰 피부도 잃고
곧고 정하던 몸가짐도 잃고
나날이 여위어가는 시청 앞 가로의 자작나무처럼
저 자작나무처럼
따뜻하던 눈보라도 잃고
상큼하기만 하던 높새바람도 잃고
지상에서 가장 먼저 햇살을 이마로 받던
그 기억도 잃어버리고
숫제 그 청청하던 잎부터 말라가는
포도에 드리운
그림자조차 말라가는 저 자작나무처럼
홀로 술을 마신 적 있었던가. 아주 오래된
사랑을 안고 술잔을 기울인 적 있었던가
박현솔, 안개의 발바닥은 왜 검은가
강가에 어스름이 밀려올 무렵
사람들이 흘려보낸 물소리가 안개가 되어 흐르네
그 안개 속, 도시의 잊혀진 이야기가
물비늘로 밀려와 강기슭에 쌓여가네
검은 근육질의 강 속에 토사물이 함께 흐르고
낡은 슬리퍼 한 짝을 삼켰다가 뱉으며
도시의 검은 부유물들을 울컥울컥 토해놓는 강물과
그것들을 가만히 감싸 안는 안개가 물의 유목을 몰고
강의 하류 쪽으로 흘러가네
긴 도시의 강을 업고 온 안개의 발바닥이 너덜거리고
미세한 혈관들이 터져 얽혀 있던 길들이 쏟아지네
안개의 발밑 평온해 보이는 강물 속에
먼 곳에서 흘러든 부음들이 하나 둘 젖은 몸을 뒤척이고
사람들의 검은 울음이 불씨를 숨긴 채 꺼져가네
나는 안개에 떠밀려온 깊은 물소리를 듣고 있네
오래 전 강가를 떠돌던 사람들에게
물소리 외피를 벗겨 물결의 안부를 띄우네
누군가 던져 넣은 슬픔 속으로
안개의 발이 빠지는 것을 보았네
안개의 검은 발바닥을 보았네
이성복, 비
가라고 가라고 소리쳐 보냈더니
꺼이꺼이 울며 가더니
한밤중 당신은 창가에 와서 웁니다
창가 후박나무 잎새를 치고
포석을 치고
담벼락을 치고 울더니
창을 열면 창턱을 뛰어 넘어
온몸을 적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