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영, 바람의 노래
바람 소리였던가
돌아보면
길섶의 동자꽃 하나
물소리였던가
돌아보면
여울가 조약돌 하나
들리는 건 분명 네 목소린데
돌아보면 너는 어디에도 없고
아무데도 없는 네가 또 아무데나 있는
가을 산 해질녘은
울고 싶어라
내 귀에 짚이는 건 네 목소린데
돌아보면
세상은
갈바람 소리
갈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소리
박재삼, 나무
바람과 햇빛에
끊임없이 출렁이는
나뭇잎의 물살을 보아라
사랑하는 이여
그대 스란치마의 물살이
어지러운 내 머리에 닿아
노래처럼 풀려 가는 근심
그도 그런 것인가
사랑은 만 번을 해도 미흡한 갈증
물거품이 한없이 일고
그리고 한없이 스러지는 허망이더라도
아름다운 이여
저 흔들리는 나무의
빛나는 사랑을 빼면
이 세상엔 너무나 할 일이 없네
장수현, 장자(莊子)의 맨발
광화문역 지하계단에 웅크려 잠든 사내
얼룩무늬 부전나비 같은 맨발을 보았지
그 사내 해몽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있었지
헐벗은 아이들 그렁그렁 매달고
무수히 짓밟히며 거리를 떠돌았을
저 순한 맨발의 전생은
나비가 아니었을까
퇴화된 날개 접고 절뚝이며 꿈길 가는
장자(莊子)의 젖은 맨발 가만히 엿보았지
가파른 생(生)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지
홍수희, 능소화 꽃잎에 울다
한 발짝만
단 한 발짝만 물러나면
내가 보일텐데요
내 슬픔이 보일텐데요
내 분노의 정체도 보일텐데요
내가 내게서
한 발짝 물러나는 것이
이리도 어려워요
돌아가는 세상이야기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는 것이
이리도 어려워요
한때는 그리도 쉬워 보이던 것
내 웃음소리도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요
밤낮 이글거리는 머릿속
한 발짝만 물러서서 바라본다면
저 헝클어져 치열한 파도의 소용돌이
잠잠해질 것 같은 데도요
빗줄기 속 불면의 밤들은 아랑곳없이
아스팔트는 뜨겁게 침묵하는데
주홍빛 능소화만 흐드러지게 피었어요
그래서 그런데 눈물만 나요
천종숙, 한 알의 사과를 위하여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어린 나무에게
날마다 해가 머무르다 가곤 했습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시침 뚝 떼고 서 있는 나무가
아무래도 수상쩍었습니다
나무는 하루가 다르게 성숙해갔습니다
반질반질 화색이 도는 이파리
도톰하게 물이 오른 장딴지
사랑에 빠진 게 분명했습니다
아무튼 모른 척 하기로 했습니다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그들의 애정 행각은
작은 나무가 휘어지도록 드러났습니다
수나귀와 암말이 만나면 노새가 태어나듯이
해와 나무가 만나 한 알의 사과를 맺은 것 입니다
해를 꼭 빼닮은 열매들은
아기 볼처럼 탐스러웠습니다
해와 나무의 뜨거운 사랑을
한 입 스윽 베어 문 날 밤
나는 한 알의 사과처럼
그에게 스미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