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 눈물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정윤천, 저녁의 시
저녁이 오면
사람들의 마을에 아름다움의 빛깔이 든다
저녁이 온다고 마을이 저 혼자서 아름다워지랴
한낮의 온갖 수고와 비린 수성(獸性)들도 잠시 내려 두고
욕망의 시침질로 단단히 기웠던 가죽지갑도 주머니 속에 찔러 두고
서둘지 않아도 되는 걸음들로 사람들이 돌아오기도 하는 때
돌아와서 저마다의 창에 하나 둘의 등불을 내걸기도 하는 때
그러면 거기, 일순처럼 사람들의 마을로는 아름다움의 물감이 번지기도 한다
더러는 제 아이들의 재잘거림 속으로 방심과도 같은 마음의 등을 기대기도 하면
머리 위의 하늘에선 이 지상의 계급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어린 별들의 수런거림이 일렁이기도 하는 때
저녁이 오면
저녁이 오면
어디선가, 낮은 처마의 이마께를 어루만지며
스스럼 없는 바람의 숨결 같은 것이 시간의 긴한 어깨 위를 스치고 지나가기도 한다
이해리, 나무의 길
참나무는 밑동이
하늘을 향하도록 해서 태운다
나무의 길대로 태워야 좋은 숯이 되는데
나무의 길은 하늘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뿌리 쪽으로 나 있다는 것이다
대지에 뿌리박고 살아있는 동안 나무는
순순히 갈 수 있는 길 혹은 가고 싶은 길
땅 속에 꼭꼭 숨겨두고
길 아닌 길을 무성하게 피워 올린 셈이다
무언가 거역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반대의 길을 강요받은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나뭇가지와 잎과 열매들은
나무의 아픔 혹은 상처가 아니었을까
가끔 누군가의 아픔이나 상처가 세상을 푸르게 한다
잎을 달고 새를 품고 구름을 우러르는 동안
뻗어나갈 듯 자꾸 막히는 캄캄한 나무의 길은
얼마나 많은 갈등을 했을까
아무에게도 내색 않은 갈등을 몸 속에 숨겼다가
죽어 숯가마에 들면 비로소
섭씨 6,000도의 불꽃에 활활 몸을 맡기고 엿새 밤낮을
타오르며 거꾸로 피워 올렸던 힘들고 고단했던 길을
뜨겁게 밝히는 숯나무
그리고 숯, 또 하나의 길로 완성되었을 그
순도 높은 인내
혹은 뜨거운 마감
나는 세상 밖으로 나갈 때 그렇게
뜨겁고 깨끗한 길 하나 낼 수 있을까
강재현, 저문 강
바람맞으러 떠나는 길은
쓸쓸하여라
닻배소리 들리는 저문 강 저편으로
워나리 달빛이 잠들고
내색도 않던 슬픈 강은
눈물로 흐른다
흐르는 눈물만큼
흘리는 눈물도
아름다워야 하느니
어딘가에서 저처럼 울고 있을
사람을 위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지 않는다
박지웅, 슬프지 않은 시
길에, 나비 하나 굴러다닌다
죽어서도 팔랑거린다
돌아보니
잔잔히 손 흔드는 나비
가끔 달로 날아가는 나비들이 있다
가끔 꽃에 부딪쳐 죽는 나비들이 있다
가끔 세상을 잘못 넘어오는 나비들
그런 나비들의 몸을 헤쳐보면
꽃가루보다 뼛가루가 더 많이 나온다
아버지도, 신기섭도 춤추다가 춤만 추다가 떠났다
춤추지 말지, 아름답지나 말지
그대들 살다 간 한철이
남은 자에게 평생이 된다는 것을 아는지
슬프지 않은 시를 쓰자, 마음먹고
나는 지하방에서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