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업, 겨울 강
그리움 흘러 흘러
강이 된다면
그 강 배 저어 다가가련만
흘러도 흘러도
가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이기에
얼어붙은 제 몸에, 쩡쩡
칼금 그으며 저리도 운다
정일근,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솥발산 산자락에 살면서부터
마당에 놓아둔 나무 책상에 앉아
시(詩)를 쓴다, 공책을 펼쳐놓고
몽당연필로 시를 쓴다
옛 동료들이 직장에서 일할 시간
나는 산골 마당이 새 직장이고
시가 유일한 직업이다
월급도 나오지 않고
의료보험 혜택도 없지만
나는 이 직장이 천직(天職)인 양 즐겁다
나의 새로운 직장 동료들은 꽃들과 바람과
구름, 내가 중얼거리는 시를
풀꽃이 키를 세우고 엿듣고 있다
점심시간,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바람이 공책을 몰래 넘기고
구름이 내 시를 훔쳐 읽고 달아난다
내일이면 그 들은 더 멋진 시 보여주며
나에게 약을 올릴 것이다
이 직장에서 꼴찌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열심히 마당으로 출근한다
정호승, 별들은 따뜻하다
하늘에는 눈이 있다
두려워할 것은 없다
캄캄한 겨울
눈 내린 보리밭길을 걸어가다가
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나에게
진리의 때는 이미 늦었으나
내가 용서라고 부르던 것들은
모든 거짓이었으나
북풍이 지나간 새벽거리를 걸으며
새벽이 지나지 않고 또 밤이 올 때
내 죽음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박두진, 도봉
산(山)새도 날러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듯
홀로 앉은
가을 산(山)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山)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 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생(生)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갖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문인수, 서쪽이 없다
지금 저, 환장할 저녁노을 좀 보라고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떴다, 얼른
현관문을 열고 내다봤다, 지척간에도 시차 때문인지
없다, 15층짜리
만촌 보성아파트 107동
기역자 건물이 온통 가로막아 본연의 시뻘건 서쪽이 없다
시뻘겋게 녹슬었을 것이다
그 죄 사르지 않는 누구 뒷모습이 있겠느냐
눈물 훔쳐 물든 눈자위, 퉁퉁 부어오른 흉터 같은 것으로 기억하노니
아름다운 여분, 서쪽이 없다
말하자면 나는 이미 그대 사는 곳의 서쪽
이 집에 이사 온지도 벌써 십년 넘었다, 인생은 자꾸
한 전망 묻혀버린 줄 모른다. 몰랐다. 다만
금세 어두워져, 저문 뒤엔 저물지도 않는다, 어여쁜 친구여
무엇이냐, 분노냐 슬픔이냐 그 속 뒤집어
널어놓고 바라볼 만한 서쪽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