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조, 섣달 그믐날
새해와서 앉으라고
의자를 비워주고 떠나는
허리 아픈 섣달 그믐날을
당신이라 부르련다
제야의 고개마루에서
당신이 가물가물 사라져가는 걸
뚫어서 구멍내는 몸짓으로
나는 바라봐야겠어
세상은
새해맞이 흥분으로 출렁이는데
당신은 눈 침침, 귀도 멍멍하니
나와 잘 어울리는
내 사랑이 어찌 아니겠는가
마지막이란 심오한 사상이다
누구라도 그의 생애
섣달 그믐날을 향해 달려가거늘
이야말로
평등의 완성이다
조금 남은 시간을
사금처럼 귀하게 나누어 주고
여윈 몸 훠이훠이 가고 있는 당신은
가장 정직한 청빈이다
하여 나는
가난한 예배를 바치노라
양성우, 천은사에서
보아라, 개울물도 눈뜨면 소근거리고
가끔씩 심각하게 소리치지 않느냐
버둥거려도 지울수 없는 손톱자욱을
쇠북소리로 어떻게 가리란 말이냐
하찮은 근심 따위야 바람끝에 묻혀 가지만
부처님은 언제나 자비롭고
보아라, 그 발밑에 숨쉬는
귀신들을 보아라
지아비나 지어미의 작은 소원도
때로는 몹시도 번거로운 것
빼앗기며 서럽게 살아갈지라도
쓰러지지 않으면 될게 아니냐
부끄럽지 않다면 벌거벗어도 좋은
둥둥떠서 흐르는 우리들의 일상
보아라, 무덤이 가까이 있고
보이는 것은 모두 늙어가지 않느냐
이기철, 열하를 향하여
지원은 하룻밤에 아홉의 강을 건너
거친 모래 땅 열하에 도달 했다지만
나는 아홉의 밤을 불면으로 지새워도 한개의 강을 건너지 못했다.
마음 덮으면 없는 강이 마음 밝히며 열의 강으로 소리를 놓인다.
숱 많은 머리카락 날리며 바람은 어디로 불어 가는가
메마른 계절일수록 마음은 불타 올라
쓰라린 시대에는 쓰라린 정신만 남는다
참말 뜨겁게 살아 보리라
마음 다지면 맨살의 모래는 끓어오르지만
다가서면 열하는 마음 밖 백리에 피안으로 누위 있다
아직도 멀었느냐 아픈 발 내리고 내 몸 잠시 쉬일 곳은
내 발 디뎌 참새 발자국만한 흔적 남길수 없는 땅 위에
낙타의 발을 이끌고 오늘도 고삐를 죄는 세월이여
어제 상수리나무 아래 쉬던 사람들
오늘은 꿈이 어지러운 그들의 적막 위에 잠들었느냐
어제 아프던 사람들 오늘 새살 돋은 발을 이끌고
고원을 건넜느냐
바라보던 눈물겨운 것들 너무 많아
내 작은 가슴으로 그곳들의 아픈 꿈 다 끌어안을 수 없지만
눈물의 값짐을 아는 자만이 사람의 귀함도 알 수 있다
가자 날 저물면 처마 아래 들고 날 밝으면 모래밭을 걸어
슬프고 작은 것 불러모아 그들의 등 다독이며 가자
고독도 손 잡으면 친구이리니
마음의 거친 물결 재우며 가자
유안진, 서리꽃
손발이 시린 날은
일기(日記)를 쓴다
무릎까지 시려 오면
편지를 쓴다
부치지 못할 기인 사연을
작은 이 가슴마저
시려드는 밤이면
임자 없는 한 줄의
시(詩)를 찾아 나서노니
사람아 사람아
등만 뵈는 사람아
유월에도 녹지 않는
이 마음을 어쩔래
육모 서리꽃
내 이름을 어쩔래
황지우, 12월
12월의 저녁 거리는
돌아가는 사람들을
더 빨리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무릇 가계부는 가산 탕진이다
아내여, 12월이 오면
삶은 지하도에 엎드리고
내민 손처럼
불결하고, 가슴 아프고
신경질나게 한다
희망은 유혹일 뿐
쇼윈도 앞 12월의 나무는
빚더미같이, 비듬같이
바겐세일품 위에 나뭇잎을 털고
청소부는 가로수 밑의 생을 하염없이 쓸고 있다
12월 거리는 사람들을
빨리 집으로 들여보내고
힘센 차가 고장난 차의 멱살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