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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한 한국인이 있었다
게시물ID : history_839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릴케
추천 : 16
조회수 : 272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4/15 21:07:17

1895년, 작전명 ‘여우사냥’에 의해
한 나라의 국모가 자국의 궁에서 일본의 자객들에게
무참히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우리 민족에게 치욕의 역사로 기억되는 을미사변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8년 후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한 자객 고영근의 복수가 있었다.
이 복수사건의 실체는 무엇인가


 

명성황후 죽음의 순간, 그곳에 우범선이 있었다.
▶우범선은 누구인가
우리 민족에게 치욕의 역사로 기억되는 을미사변. 을미사변을 주도했던 주한일본공사 미우라는 일부 조선인들을 끌어들여 전략적으로 이용했다. 그가 노린 조선인은 훈련대 2대대장이었던 우범선이었다. 일본이 창설한 신식군대인 훈련대는 당시 명성황후의 반일정책에 따라 해산 위기에 놓여있었다. 우범선은 이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우범선최후사』 -우범선은 을미사변에 어디까지 가담했나?
‘한 숨에 목숨이 끊어질 때, 오직 한 사람 우범선만이 그것을 보았네.’
              -『우범선최후사』중에서
우범선은 명성황후의 죽음에 어디까지 가담했던 것일까? 취재진은 우범선의 행적을 따라가던 중 초서체로 기록된 ‘우범선최후사’를 발견했다. ‘우범선최후사’는 명성황후가 시해된 그날의 행적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명성황후의 시신이 불태워질 때, 우범선은 그 현장에 있었다. 을미사변 후 일본으로 망명한 우범선은 고영근의 손에 죽기 전까지 일본의 각별한 후원아래 부족함 없이 살아갔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조선 자객 고영근,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다!
▶고영근은 누구인가
고영근은 ‘민영익의 겸인’으로 궁중에 출입하며 명성황후의 눈에 띄어 벼슬에 올랐다.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와 ‘중추원 1등의관’에 오를 정도로 명성황후와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고영근은 고종의 명으로 황국협회 부회장이 되었다. 그런데 황국협회가 폭력단체가 되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만민공동회에 참가하여 만민공동회장이 된다.
▶고영근은 어떻게 우범선을 살해했나
자취를 감췄던 고영근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일본 구레였다. 구레는 우범선이 을미사변 이 후 조선인들을 피해 조용히 살던 곳이었다. 고영근은 우범선에게 망명객 윤효정의 암살계획을 밀고해 우범선의 호감을 샀다. 그리고 고영근은 우범선의 집 근처에 살기를 원했고 우범선은 집을 구해주었다. 그 와중에 노윤명을 불러들여 살해계획을 세웠고 마침내 그는 우범선을 자신의 집으로 유인하는데 성공한다.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적의 목을 베다
▲적괴참살복국모수(賊魁斬殺復國母讐): 국모를 원수를 갚기 위해 적의 목을 베다.
고영근은 자수하여 재판을 받을 때에도 우범선의 살해 이유를 ‘적괴참살복국모수’라 당당히 말하며 사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반면,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우범선을 살해한 그의 범행을 일본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범죄를 저지른 것을 몰아가려 했다. 한 편, 고종은 사형을 선고받은 고영근을 석방시키기 위해 노력하는데 힘을 쓴다.

 

죽어서도 계속되는 우국충정의 신념
▲‘대한 홍릉 명성 황후’에서‘대한고종태황제홍릉 명성태황후부좌’가 된 홍유릉 비석
고영근은 일본에서 8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온다. 고영근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능참봉이 되어 능을 지킨다. 그는 목숨을 걸고 ‘대한 홍릉 명성 황후’ 가 새겨져 있던 비석에 여덟 글자를 추가로 새겨 넣어 ‘대한고종태황제홍릉 명성태황후부좌’ 비석을 완성한다.
고영근은 참봉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홍릉을 떠나지 않고 고종의 곁을 지키는 우국충군의 신념을 보였다.

 

 

몇 해전 방연된 KBS역사스페셜 내용입니다

우범선 그의 아들이 그 유명한 우장춘 박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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