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 백년
와병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서
빈 의자처럼 쓸쓸히 술을 마셨네
내가 그대에게 하는 말은 다 건네지 못한 후략의 말
그제는 하얀 앵두꽃이 와 내 곁에서 지고
오늘은 왕버들이 한 이랑 한 이랑의 새잎을 들고
푸르게 공중을 흔들어 보였네
단골 술집에 와 오늘 우연히
시렁에 쌓인 베개들을 올려 보았네
연지처럼 붉은 실로 꼼꼼하게 바느질 해놓은
백년이라는 글씨
저 백년을 함께 베고 살다간 사람은 누구였을까
병이 오고, 끙끙 앓고, 붉은 알몸으로도
뜨겁게 껴안자던 백년
등을 대고 나란히 눕던, 당신의 등을 쓰다듬던
그 백년이라는 말
강물처럼 누워 서로 서로 흘러가자던 백년이라는 말
와병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하루를 울었네
문정희, 먼 길
나의 신 속에 신이 있다
이 먼 길을 내가 걸어오다니
어디에도 아는 길은 없었다
그냥 신을 신고 걸어왔을 뿐
처음 걷기를 배운 날부터
지상과 나 사이에는 신이 있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뚱거리며
여기까지 왔을 뿐
새들은 얼마나 가벼운 신을 신었을까
바람이나 강물은 또 무슨 신을 신었을까
아직도 나무 뿌리처럼 지혜롭고 든든하지 못한
나의 발이 살고 있는 신
이제 벗어도 될까 강가에 앉아
저 물살 같은 자유를 배울 수는 없을까
생각해보지만
삶이란 비상을 거부하는
가파른 계단
나 오늘 이 먼 곳에 와 비로소
두려운 이름 신이여!를 발음해본다
이리도 간절히 지상을 걷고 싶은
나의 신 속에 신이 살고 있다
이생진, 영혼은 싫다
나는 너를 만나기 위해 긴 세월
긴 시를 쓴 사람이다
너는 날 만나기 위해
자갈밭에 앉은 여인들과 함께
내가 물고 늘어질
주낙낚시에 미끼 꿰고 있었는가
나를 낚기 위해
너의 영혼을 꿰고 있었는가
영혼의 미끼는 싫다
살아 있는 육체로 오라
장석남, 배를 매며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오세영, 바닷가에서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
바닷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는 물이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바닷가
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마침내 밝히는 여명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는 충족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롭거든
바닷가
가물가물 멀리 떠 있는 섬을 보아라
홀로 견딘는 것은 순결한 것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
스스로 자신을 감내하는 자의 의지가
거기 있다